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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19 FEATURE

내 영혼을 위한 밀면 한 그릇

  • 2019-07-02

밀면의 계절이 왔다.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한 밀면 한 그릇을 먹으면 맹렬하게 들러붙는 이 더위도 잠시 떼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이 계절에 생각나는 밀면집으로 간다.



부산 사람에게는 ‘내가 즐겨 찾는 밀면집이 최고’라는, 특유의 ‘밀면 부심’이 있다. 어릴 때부터 가족과 맛있게 먹던 밀면 맛에 대한 추억이 적금처럼 차곡차곡 쌓인 탓이다. 그러니 친한 지인이 손잡고 데려간 밀면집은 내가 가는 곳만 못하고, 새로 생긴 밀면집은 동네 주민의 마음을 쉽게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밀면은 선명하게 우열을 가릴 수 있을 만큼 맛이 빼어난 음식일까. 작년 이맘때 ‘부산푸드필름페스타’ 참석차 부산을 찾은 음식 칼럼니스트 황교익을 인터뷰하며 부산 밀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밀면을 미식의 범주에서 볼 게 아니라 개성 강한 음식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질 좋은 재료와 정교한 기술로 완성하는 미식 범주의 음식이 아닌, 지역의 정서가 강하게 반영된 개성 그 자체에서 음식의 매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산 사람이 아니고서는 쉬이 정서적 공감을 얻기 힘든 맛. 그래서 밖으로 뻗어나가지도 못했다. 서울에서 부산 밀면 맛있게 하는 집을 본 적이 있는가? 찾아보기 어렵다. 비행기 안에서도 전주비빔밥을 먹고, 북한보다 남한 사람이 더 챙겨 먹는 것 같은 평양냉면집이 전국 팔도에 널렸지만, 밀면은 그렇지 않다. 밀면은 부산에서만 유난히 ‘먹히는’ 음식이다. 부산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며, 커피만큼 기호와 취향의 음식이 되었다. 이른바 ‘스리콤(새콤, 달콤, 매콤)’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는 양념장에 냉면처럼 식초, 겨자 소스까지 넣어 입맛대로 즐긴다. 절인 무나 육수를 가감해 감칠맛을 조절할 수 있는 것도 특징. 육수의 감칠맛과 면의 탄성은 밀면 맛에서 매우 중요하다. 집집마다 재료의 차이는 있지만, 소.닭.돼지 뼈와 고기, 각종 채소와 한방 약재 등을 넣고 우려낸 육수, 밀가루와 전분을 섞는 비율에 따라 결정되는 면의 탄성이 밀면 맛을 좌우한다. 태생이 냉면 ‘대타’ 내지는 ‘후속작’이므로 여러모로 냉면과 비슷하지만, 밀가루로 면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또 남부의 지역색이 짙게 배어 있어 다진 양념으로 맵고 짜고 시고 달게 먹는, 조금은 자극적이다 싶을 만큼 한 그릇으로 ‘맛의 버라이어티’를 즐기는 게 밀면의 매력이다. 이제, 어디로 가야 이런 밀면을 즐길 수 있을까?
냉면 대타로 밀면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곳이 내호냉면이다. ‘Since 1919’, ‘부산 최초 밀면 제조’라고 적힌 간판의 위용만큼 입소문 난 곳이다. 이북에서 냉면을 만들다가 어쩌다 부산에서 밀면을 만들게 되었는지, 어떻게 4대째 한곳에서 맛을 이어왔는지 등 드라마틱한 스토리도 있다. 소고기 사골로 낸 육수, 비빔밀면에 고명으로 올린 숙성한 가오리, 고구마 전분과 밀가루의 배합 비율 등 냉면에 가까운 맛을 내서 호불호도 갈린다. 흔히 개금밀면, 가야밀면, 국제밀면 등 부산 3대 밀면집을 꼽을 때 이곳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부산 사람들이 즐기는 밀면의 ‘전형적인’ 맛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00년 세월을 지켜온 집에 맛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악스러운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어떤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앞집, 옆집, 뒷집을 다 사서 자리를 지켜온 것 자체가 실력이다.




가야밀면과 근거리에서 오랜 세월 ‘투 톱’을 지내온 개금밀면은 부산 사람뿐 아니라 타 지역 사람에게도 일정 이상 맛으로 공감을 얻고 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가야밀면이 부산 ‘싸’나이라면, 개금밀면은 부산 ‘사’나이다. 두 곳 모두 특유의 버라이어티한 부산밀면 맛을 만들어왔는데, 개금밀면이 좀 더 균형 감각이 좋다고 할까. 다진 양념은 적당히 맵고 시고 달며, 육수는 노골적으로 진한 대신 깔끔하고 시원하게 감긴다. 부산밀면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곳이다.
내호냉면과 개금밀면 못지않은 부산의 노포로 연산동의 북청밀면이 있다. 간판도 없고 규모도 크지 않아 흔한 동네 밀면집처럼 보이는데, 어느 순간부터 부산 미식가 사이에 입소문이 났다. 다진 양념을 풀지 않은 채 육수만 맛보면 심심하다 싶게 담백하고 깔끔하다. 소박하지만, 요령 따위 없는 맛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러나 다진 양념을 풀고 맛본 북청밀면의 맛은 익숙한 밀면 맛과는 조금 다르다. ‘어르신’ 맛이다. 1970~1980년대 경남 지역에 유행했다는 ‘설탕국수’의 이력이 엿보인달까. 담백한 육수 이면에 참기름과 설탕 맛이 은근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느 곳보다 신맛도 덜하다. 다진 양념에 참기름과 설탕이 더해지니, 북청밀면은 ‘비빔밀면도 맛있다’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소주의 도수가 점점 낮아지고 레드보다 화이트 와인의 매력이 부각되는 요즘, 밀면도 자극적인 것보다는 냉면에 가까운 맛을 찾는 이가 많다. 그런 이들이 양쪽 엄지손가락 세우며 강력 추천하는 곳이 동대신동의 영남냉면밀면이다. 연중 석 달은 휴무, 밀면과 냉면의 계절이 돌아오면 ‘영접’하게 되는 이곳의 육수는 삼삼한 듯 감칠맛이 나고, 말갛지만 깊이와 힘이 느껴진다. 다량의 다진 양파를 넣은 양념은 건강한 단맛이 식감을 얼마나 산뜻하게 갈무리하는지 실감하게 한다. 인근에 주차장을 3개나 확보한 것에서 저력을 짐작할 수 있다. 해운대 양산국밥은 깔끔하고 세련되게 즐길 수 있는 돼지국밥집으로 유명하지만, 이곳에서 밀면을 한번 맛보면 그 맛을 쉬이 잊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인상적인 밀면을 낸다. 서울 유명 냉면집에서 경력을 다진 요리사가 평양냉면식으로 낸 육수를 쓴다. 맑고 가벼워 보이지만, 시간이 진득하게 붙은 농밀하고 고소한 육미(肉味)를 느낄 수 있다. 절인 무 대신 백김치를, 삶은 달걀 빼고 달걀지단만, 고기를 고명으로 얹는 대신 두툼하게 썰어 따로 준다. 이때 맵싸한 비빔밀면에는 적당히 기름기가 있는 삼겹살 수육을, 물밀면에는 기름기 없는 목살 수육을 낸다. 지극히 서민적인 밀면을 스테인리스 면기 대신 놋그릇에 담는 것에서 그 간극이 조금 과하게 느껴지지만, ‘이까짓’ 밀면 한 그릇에도 융숭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든다.
반여동의 부다밀면은 좀 더 마니아적 밀면이다. 100% 밀가루로만 만들어 소면처럼 부드럽게 끊기는 면과 사태살을 넣어 끓인 육수의 조합은 세상에 없던 밀면 맛을 낸다. 평양냉면식으로 즐기는 밀면. 다진 양념은 따로 곁들일 뿐 함께 섞지 않는다. 삼삼한 육수를 은근한 밀가루 향이 그럴듯하게 맞받아치며 섞이는 맛이 매력적이다. 밀면도 밀면이지만, 100% 메밀로 만든 면을 쓴 순메밀냉면이 부다밀면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개인적 기호와 취향을 전제하고 한 그릇을 꼽으라면, 에디터의 밀면 맛집은 양산국밥이다. 육수의 깊이가 남다르다. 냉면에 가까운 밀면으로 현대적 해석이 농후한 점도 재미있다. 깔끔하고 정갈한 비주얼도 한몫한다. 그러나 호불호가 명백한 밀면이다. 모두에게 공감을 얻기 힘든 맛이다. 누군가는 “이기 밀면이가?”라고 한 소리 할 것 같은 맛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밀면 한 그릇 잘 먹었다” 소리 나오게 만드는 밀면집을 꼽으라면, 개금밀면이다. 개금밀면은 오랜 세월 지켜온 부산밀면 맛의 집대성이자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곳이다. 맛에 대한 흔들림과 부침이 없고, 타 지역 사람들이 맛봐도 평균 이상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지나치게 자극적이지도 않고, 자극을 걷어냈다고 모자란 것도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밀면은 순위를 따질 음식이 아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나 ‘우동 한 그릇’처럼 부산 사람들에게 밀면은 그 자체로 솔 푸드(soul food)다. 정수리로 내리꽂히는 햇빛이 못 견디게 원망스러운 이 계절, 눈앞에 놓인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뒤 “이제 좀 살 것 같다” 소리가 절로 나오게 하는 그런 맛. 그게 밀면이다.

 

에디터 손지혜 사진 공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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