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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19 LIFESTYLE

불완전하고 완전한 선미

  • 2019-06-29

박서보의 묘법 작품 앞에 선 선미. 서로 다른 시공간에 머물던 두 아티스트의 교차점에서 가장 동시대적인 예술적 공명을 포착했다.

박서보, 묘법(描法) No.161207, 2016, 캔버스에 한지, 혼합매체, 200 x 300 cm, 작가 소장.
레드 컬러 드레스와 네크리스 Alexander McQueen.







박서보, 묘법(描法) No.990724, 1999, 캔버스에 한지, 혼합매체, 330 x 220 cm, 작가 소장.
독특한 형태의 드레스 Valentino.

“예술은 문이 열리면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이다.” 언젠가 한 화가가 인터뷰 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가수 선미를 발견한 건 그즈음, 어떤 뮤직비디오를 통해서였다. “왜 예쁜 날 두고 가시나”라 외치던 영상 속 선미는 예뻤지만 한편으로 예쁘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더 이상 세상이 정한 아름다움의 기준에 갇혀 있지 않겠다는 듯, 이제 사랑을 갈구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스스로에게 사랑받겠다는 듯 맹랑하고 발칙하고 당당했다. 그 순간 선미는 더 이상 원더걸스의 ‘그’ 선미가 아니었다. 조개껍데기처럼 두꺼운 보호막과 안전망으로 둘러싸인 기획사를 떠나 하나부터 열까지 아티스트 본인의 손을 거쳐야 하는 작은 소속사로 옮긴 뒤, 선미가 누구인지 스스로 지독하게 파고든 결과였다. 스스로를 고집스럽게 ‘덕질’하는 시간을 거쳐 마침내 자신만의 우물을 발견했고, 가시나가 주인공으로, 사이렌으로 그리고 누아르로 이어지는 동안 우물은 더욱 깊고 영롱해졌다. 아시아, 미주, 유럽 등지를 종횡무진하는 월드 투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2019년 5월의 선미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초대했다. 어쩌면 박서보 생애 마지막 회고전이 될 국립현대미술관의 <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 무대에 세우기 위해서였다. ‘묘법’에서 치솟는 오라 위에 선미가 더하는 가장 아름다운 선(線)들을 촘촘히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촬영을 마친 기분이 어때요?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영광스러운 기회였어요. 박서보 작가님의 작품 위에 또 하나의 창작을 한 거잖아요. 심지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금 월드 투어 중이고 내일 당장 런던으로 출국해야 하는데, 이런 작업은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아요. 순간순간이 설레어요.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요? 빨간색으로 칠한 색채 묘법 작품요. 완전히 압도당하는 느낌이었어요.
오늘 촬영의 배경이 된 박서보 화백의 ‘묘법’ 시리즈, 그 시작은 이러해요. 아들이 어릴 때 학교 숙제로 깍두기 모양 공책에 ‘닭’이라는 글자를 써야 했는데, 꼭 한두 획이 프레임에서 삐져나왔대요. 여러 번 실패한 끝에 결국 화가 나서 연필로 직직 그었는데, 그걸 보고 영감을 받으셨대요. ‘프레임에 뭘 넣는다는 게 불가능한 거구나’ 하면서요. 우와, 저 지금 소름 돋았어요. 촬영 전에 박서보 작가님의 작품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그림 프레임 밖으로 막 뻗쳐서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손을 상하좌우로 시원하게 뻗는 시늉을 하며) 프레임 너머 제 손끝, 발끝으로 뻗쳐나가도록 표현해도 될 것 같았어요.
선미에게도 깍두기 공책처럼 갑갑한 프레임 같은 게 있었나요? 최근에 느낀 게 있어요. 제 얼굴이 대다수 사람들이 말하는 ‘예쁜’(방점을 찍듯 힘주어 말한다) 얼굴은 아니잖아요. 정답처럼 예뻐야 대중의 롤모델이나 워너비가 될 수 있는 건가? (한 템포 쉬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군다) 아, 나 아무래도 얼굴이 더 예뻐져야 하나….
정답 같지 않아서 멋있는 것 같은데요. ‘사이렌’ 뮤직비디오를 보면 제가 욕조에서 기어 나오는 장면이 있거든요. 머리칼은 물미역처럼 얼굴에 뒤엉켜 있고. ‘누가 봐도 못생겼는데’ 싶은데, 저는 여과 없이 그 장면을 써달라고 말했어요. 그 타이밍에는 그 무드가 맞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거기선 예쁘면 안 되는 거니까. 그런데 대중은 단순히 못생겼다고 평가하기도 해요.
대중가수로서 아이덴티티를 잃게 될까 봐 겁이 나요? 맞아요. 제 자아와 캐릭터, 취향을 유지하면서 대중에게 사랑받는 가수가 되고 싶거든요. 이게 제 숙제예요. 대중성과 정체성을 각각 반쯤 취하면서 모험과 새로운 시도를 하는 편이에요. 지금은 조금씩 정체성의 비중을 늘려가는 시도를 하고 있고요. 그래서 박서보 작가님의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또한 추락한다”(박서보 화백이 묘비명으로 정해둔 문장으로, 이번 전시장에도 걸려 있다)라는 말이 크게 와 닿았어요. 어떤 의미로요?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 이게 참 모 아니면 도인 것 같아서 너무 어려워요.
어떤 의미로요?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 이게 참 모 아니면 도인 것 같아서 너무 어려워요.







박서보, 묘법(描法) No.991004, 1999, 캔버스에 한지, 혼합매체, 330 x 220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디테일이 돋보이는 롱 드레스 Fendi.

선미가 쓰는 가사에 관심이 많아요. ‘가시나’에선 가시는 님과 가시를 연결했고, ‘블랙 펄’에선 더럽고 아픈 걸 감싸는 가운데 피어난 보석 진주를 이야기했어요. 단순한 말장난이라기보다는 관찰, 본질에 대한 탐구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단어에서 영감을 많이 받아요. 어떤 단어가 떠오르면 메모장에 적어놓고 그걸 검색해봐요. 거기서 제 무한한 상상이 시작되죠.(웃음) 이를테면 마인드맵 같은 거예요. 그걸 비틀어 가사를 쓰는데, 직설적인 것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게 더 뇌리에 남잖아요. 관찰하는 것도 좋아해요. 사람들 관찰도 잘하고. 한번은 진주가 탄생하는 과정을 보다가 ‘이게 참 사람 사는 모습과 닮았구나’ 싶어서 ‘블랙 펄’을 쓰게 됐어요.
어릴 때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면서요? 지구과학이란 과목을 좋아했어요. 지구가, 생명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제가 가보지 못한, 경험해보지 못한 시간이라 신비롭게 다가오더라고요. 요즘엔 뇌에 관심이 많아요. 또 하나의 우주잖아요. 심장이 멈춰도 20~30초 정도 뇌는 살아 있다는 것, 알고 계셨어요? 심장이 멈추고도 얼마간은 청각이 열려 있대요. 도대체 뇌가 뭐길래!







박서보, 묘법(描法) No.080105, 2008, 캔버스에 한지, 혼합매체, 180 x 300 cm, 작가 소장.
옐로 컬러 슬립 톱 Emilio Pucci, 이어링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저는 요즘 로봇이 인간의 뇌를 넘어설까 봐 무서워요. 알파고랑 이세돌의 바둑 대국을 생중계로 끝까지 지켜봤어요. 그런데 엄청난 경우의 수를 습득한 알파고도 인간에게 한 번은 졌잖아요. 알파고는 어떻게든 완벽해지려고 노력하지만 사실 완벽한 사람은 없고, ‘완벽’이란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는 단어인 것 같아요. 그리고 불완전한 상태에서 분명 뭔가가 나온다고 저는 믿어요.
‘불완전한 상태에서 뭔가가 나온다’라, 어딘가 예술가 같은 표현인데요. 사람들에겐 감정이 있잖아요. 박서보 작가님이나 저나 창작하는 사람들 모두 감정, 영감을 통해 작업하는데 인공지능이 완벽하다 한들 그걸 흉내 낼 수 있을까요? 사람의 감정은 저마다 다 다르고 똑같은 DNA도 없을 텐데.
완벽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요? 얼마 전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어요. “Nobody is Perfect.” 어느 순간 불쑥 생각난 말인데, 아마도 작업 중에 ‘잘 만들어야 돼. 잘해야 돼’ 스스로 주문을 걸다 떠올랐나 봐요. 사람들은 완벽을 추구하면서도 지나치게 완벽한 걸 보면 좀 불편해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얼굴도 자로 잰 듯 좌우대칭이 완벽하면 이상하잖아요. 완벽함에서 오는 불편함 같은 게 있어요.







언젠가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작업적으로 ‘완성’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나요? 음악적으로는 작업한 노래를 모든 공간에서 모든 기기를 동원해 다 들어보고 밸런스가 맞으면 이제 됐다 싶어요. 비주얼적으로는 ‘투 머치(too much)’를 경계하고요. 평소 액세서리를 잘 안 하는데, 빈손이 더 멋있는 것 같아서예요. 촬영할 때도 그래요.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예쁜 사진이 나올 것 같은데, 멋있는 사진은 안 될 것 같은 그런 포인트가 있어요. 한 끗 차이. 그걸 잘 조절하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오늘 찍은 컷들도 전형적으로 예쁘다기보다는 멋으로서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사진이 될 것 같아요.
예술가가 하나의 작업을 지독하게 파고드는 것처럼 선미도 고집스럽게 반복하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글쎄요, 선미다움을 잃지 않는 것? 제2의 누군가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해요. 선미로서 제 길을 가는 것, 그걸 고집스럽게 반복하는 중이에요.
선미다운 게 뭘까요? (일순 눈빛이 바뀌며) 약간의 서늘함? 밝은 음악을 해도 저에겐 뭔가 서늘한 느낌이 있어요. 눈이 짝눈이라 불완전해서 그런가?
변하고 싶은 것, 변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어요? 박서보 작가님처럼 멋들어진 말은 못하지만 이렇게 표현해볼게요. 저에겐 변하고 싶지만 또 변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데 바로 산만함이에요. 댓글을 보면 저 산만하다고 “쟤 좀 어떻게 해봐라” 그런 말이 엄청 많아요. 그런데 제 표현력은 그런 감정 기복과 산만함에서 오거든요. 저도 참 고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걸 어떡해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살려고요.(웃음)

 

에디터 전희란 사진 박종하  헤어 이선영  메이크업 김건희
스타일링 이지은  어시스턴트 장체라  장소 협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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