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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19 FEATURE

박기원의 붉은 방

  • 2019-06-25

작품은 작가를 닮는다. 아기가 부모를 빼닮는 것과 비슷하다. 어떤 질문에도 즉답을 피하는 박기원 작가. 그의 작품은 주인처럼 고요히, 배경처럼 자리한다. 313아트프로젝트 성북 스페이스에서 열린 3년 만의 개인전 <연속(連續)>에서도 작가는 작품 대신 공간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신기하게 작품은 눈에 더 잘 들어왔고, 전시장 2층 ‘붉은 방’에서는 발걸음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를 기억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노랗고 주황이던 방을 기억한다. 박기원은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수상 작가다. 다음 해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동안의 올해 작가상 수상자 23명을 모아 <올해의 작가 23인의 이야기 1995-2010>전이라는 이름 아래 작가에게 공간을 내줬다. 사방이 흰 벽으로 둘러싸인 그 방에 박기원은 얇은 비닐 커튼을 ㄱ자 형태로 두르고 그 뒤로 노란빛과 주황빛 조명을 설치했다.
조명은 사부작거리는 여러 겹의 비닐을 통과하며 아스라하면서 몽환적 컬러를 만들어냈다. 박기원 작가의 방은 22명의 작가 작품이 놓인 공간과 달리 오묘함으로 가득했다. 관람객은 기묘한 이 빛이 LED 조명이 아닌, 전시장 어딘가에 난 창문을 통과한 자연광으로 여겼다. 그들은 직접 확인하려는 듯 비닐 커튼 뒤를 기웃거렸고, 박기원은 그 모습이 흥미로웠다. 공간의 실재와 환상 사이의 거리를 고민하게 한 ‘낙하 2(Falling 2)’라는 제목의 이 작업은 이후 박기원이 ‘박기원식 공간’ 작업을 구체화하는 중요한 시발점이 됐다.
충북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 제13회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촉망받는 차세대 작가로 떠오른 박기원은 1991년 윤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는 ‘공간’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한 작업을 선보이지만, 사실 초기 작업은 지금의 장소 특정적 성격과는 거리가 있다. “1990년 중반까지는 나무와 사진 프린트 등을 사용해 단순하고 미니멀한 오브제적 입체 작품을 했습니다. 서양화를 전공했고 지금도 회화 작업을 하고 있지만, 작업 초기부터 입체에 대한 관심이 있었거든요. 나무와 종이, 사진 등 서로 다른 물성을 이용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고요. 그러다 공간에 대해 본격적으로 흥미가 생긴 건 1996년경부터입니다. 공간 중에서도 벽에 관심이 많았는데,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텅 빈 벽에서 어떤 움직임 같은 걸 봤다고 할까요. 그때부터인 것 같아요. 전시장에서 벽을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기 시작한 게.”
벽에 대한 탐구에 시동을 걸며 처음 사용한 매체는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인 옥외 설치물 ‘사라진 입구’에도 이용한 옥색 FRP(폴리에스터 수지에 섬유 등의 강화제로 혼합한 플라스틱) 보드다. FRP 보드는 1996년 가인화랑 전시 때 처음 사용한 것으로, 그는 FRP 보드를 벽지처럼 쭉 세워 설치한 뒤 ‘움직임’이라 이름 붙였다. 이 작품은 공간이 갖는 순수한 성격을 해치지 않는 그의 작업 개념의 도화선이 됐고, 관람객은 공간과 오브제(작품)가 완벽한 중립의 힘을 보여줄 수 있음을 새롭게 발견했다.
반투명 옥색 보드는 베니스 비엔날레에도 진출했다.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작가 15명에 선정되었을 때 한국관 파사드 전체를 옥색 반투명 FRP 보드로 두르며 매체에 대한 애정을 또 한번 드러낸 것. 당시 한국관 큐레이터였던 김선정 현 광주비엔날레 대표는 외부 풍경을 자연스럽게 내부로 끌어들이는 ‘차경’이라는 개념을 활용했다. 박기원 작가는 베니스의 주변 풍경을 배경으로 옥색 보드를 두른 한국관을 하나의 조형물처럼 연출하며 외신 기자에게 호평을 받았다. “FRP 보드를 외벽에서 감싼 뒤 그것이 내부로 이어지는 동선 작업을 했어요. 최정화.정연두.문성식 등 젊은 작가들과 함께한 전시였는데, 모두 한국관이라는 공간을 활용해 한국 현대미술의 흥미로운 단면을 보여주려 노력했죠. 14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작가 모두 작업을 개성 있게 잘 보여준 것 같아요.”




1 <연속>전이 열리는 성북동 313아트프로젝트 전시장 2층에서는 공간을 분할한 푸른빛의 ‘넓이(Width)’ 회화 연작과 컬러 비닐, LED 조명을 이용한 설치 작품 ‘붉은 방(Red Room)’이 만들어내는 색의 교감을 확인할 수 있다.
2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 23명을 모아 선보인 <올해의 작가 23인의 이야기 1995-2010>전에서 박기원 작가가 발표한 ‘낙하 2(Falling 2)’.

앞서 설명한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23인의 이야기 1995-2010>전에서처럼 대규모 전시마다 빠지지 않는, 컬러 비닐을 커튼처럼 길게 드리운 채 펄럭이게 한 작품도 1997년 호주 멜버른의 컨템퍼러리 포토그래피 센터 전시의 ‘부피(Volume)’작업에서 처음 사용한 무색 투명 비닐에 바탕을 둔다. “작품이 중요한 만큼 작품이 놓이는 공간의 모습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작품이 공간을 해쳐서는 안 되죠. 주어진 공간을 최소한의 형식으로 구현하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 가장 매력적인 매체가 무엇일까 생각하다 얇고 투명한 비닐을 떠올렸습니다.”
2015년 DDP에서 열린 전,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30년 특별전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와 313아트프로젝트에서 열린 개인전 <성장공간>, 2018년 OCI미술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 그리고 이번 개인전 <연속>에 선보인 ‘붉은 방(Red Room)’까지 LED 조명이 비춘 컬러 비닐 작업은 박기원의 대표 시리즈가 되었고, 작품과 공간이 상생하는 완벽한 공존 형태를 보여준다.
특히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컬러 비닐 작업은 DDP에서 열린 < Esprit Dior >전에서 선보인 ‘선샤인(Sunshine)’. 서도호 . 이불 . 김혜련 등 한국의 대표 작가 6명이 디올과 협업한 이 전시에서 박기원 작가는 몽환적 핑크와 레드 조명의 비닐 설치와 한지 페인팅 작업 ‘넓이’ 연작을 함께 배치해 크리스찬 디올의 사랑스러운 컬러 세계를 몽환적으로 연출했다. “4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전시를 생각하면 여전히 만족감이 커요. 디올 파리 본사에서 그 전시를 직접 핸들링했는데, 진행이 무척 세련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작가들이 작품에 매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여섯 작가의 작품이 잘 어우러진 건 모두 큐레이터의 능력이었죠.” 당시 디올에서 그에게 준 키워드는 ‘핑크에서 레드까지’. 세상 모든 분홍빛이 DDP의 높은 층고를 배경으로 폭포수처럼 눈부시게 쏟아지던 그의 작품은 관람객이 옆을 지날 때마다 사각사각 춤을 추었고, 그곳을 방문한 관람객은 현대미술 작품과 공간의 중요한 상호작용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는 기회가 됐다.
박기원이 ‘세련되었다’고 회상하는 파리지앵과의 인연은 다음 해인 2016년에도 이어졌다. 프랑스의 국제 아트 페어 ‘아트 파리’가 열린 그랑 팔레의 건축 전면에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10m짜리 스틸 구조물 ‘플래시 월’을 설치할 기회를 얻은 것. 그랑 팔레 내부로 진입하는 입구 양옆으로 철사를 풀어 엮은 이 작품엔 파리에서 벌어진 테러의 상흔에 대한 위로와 평화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애니시 커푸어,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다니엘 뷔랑 등이 전시를 연 그랑 팔레 입구 전면을 큼지막하게 장식한 박기원 작가의 힘 있는 행보는 미술 기자의 기사를 통해, 그리고 파리를 찾은 관광객의 SNS를 통해 조용히, 하지만 널리 알려졌다.
그간 박기원의 전시를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쉽게 연상할 수 있듯, 그의 작품은 대부분 공간 특정적 성격을 띤다. 여느 작가처럼 매일 아침 규칙적인 출퇴근과 절대적 시간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부지런을 떨기보다, 전시가 결정됨과 동시에 부산을 떠는 작업 과정이 요구된다. 이쯤 되면 그의 일상이 궁금해진다. “공간 작업을 하고 있지만 설치 작업 일정이 없는 날은 천천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요. 특히 한지에요. 그 외에도 자잘하게 스케치를 하거나 새로운 재료 또는 방식 등을 노트하며 하루를 보내요. 전시 공간이 결정되면 그 장소의 성격을 고민하며 그간 작업한 스케치나 노트 등을 참고하는 편이죠.”
현재 성북동의 한 주택가 골목에 위치한 313아트프로젝트에서 열리는 <연속> 전시도 그의 평소 구상이 반영된 결과다. 그중 전시장 1층을 가득 메운 미니 피라미드 모양의 검정 스펀지 바닥은 예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작업.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이 풀밭에서 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구현하고 싶던 그는 이번 전시에서 검은색 스펀지를 검지손가락 길이로 잘라 작은 피라미드를 만들고는 1층 전시장 바닥 전체에 깔았다. 관람객은 전시장 입구에서 슬리퍼로 갈아 신거나 양말만 신은 채 입장한 후 폭신한 피라미드를 밟으며 새로운 촉감을 경험했다. 서거나 걷는, 때로는 바닥에 앉는 행위를 통해 서로를 관찰하며 공간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는 늘 제 작품이 배경처럼 보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작업을 할 때 늘 작품과 사람이 섞여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죠. ‘벽에 작품이 걸려 있고 팔짱을 낀 관람객이 그 앞에서 작품을 감상한다’는 식의 스토리보다는 어떻게 하면 작품과 관람객 모두 주연이 될까를 고민하는 편이에요.”
박기원은 반듯한 화이트 큐브가 아닌, 옛 성북동 주택 구조를 그대로 살린 갤러리의 독특한 동선을 고려해 작품 배치도 다채롭게 구상했다. “이곳은 전체적 동선이 특이한데, 갤러리 대문 입구에서부터 전시장까지 거리가 긴 점이 특히 남다릅니다. 저는 관람객이 대문을 열고 들어와 처음 만나는 작품이 전시장 내부에서 펼쳐질 상황에 대한 어떤 암시를 주었으면 했어요. 그래서 대문에서부터 본관 입구로 향하는 통로를 옥색 FRP 보드로 감싼 ‘사라진 입구’를 설치했습니다.”




3 박기원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검은색 스펀지로 작은 피라미드를 만든 ‘피라미드 바닥(Pyramid Ground)’을 1층 전시장 바닥 전체에 깔고 천장에는 ‘X모빌(XMobile)’을 설치했다.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 ‘X’를 통해 작가는 공간을 제로 상태로 표현했다.
4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박기원 작가의 <누가 미술관을 두려워하랴>전. 중앙 홀 전체를 시트지로 붙인 작품 ‘배경(Scenery)’에서 관람객은 작품과 장소의 상호 관계성을 경험했다.
5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파사드 전체를 옥색 반투명 FRP 보드로 두른 모습. 베니스의 주변 풍경을 배경으로 한국관을 마치 하나의 조형물처럼 연출했다.

관람객이 옥색 보드 작업을 설치한 계단을 지나 전시장 1층에 들어서면 푹신한 스펀지 작업과 X모빌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X모빌은 그간 제주도립미술관과 청주시립미술관, 갤러리소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등에서 선보인 대규모 공간 테이핑 작품 ‘X’를 모빌 형태로 재해석한 것이다. 아무것도 없음을 상징하는 X를 통해 공간을 제로 상태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바람이 담겼다. “대문 입구, 전시장 1층 그리고 2층이라는 공간을 거치면서 장소마다 각기 다른 경험을 선사해 전시를 하나의 활기차고 재미난 여정처럼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저는 X모빌이 그 역할을 할 거라고 믿었죠. 일반적으로 작가의 모빌 작품은 완벽한 형태로 마감되어 있는데 X모빌은 아니에요. 검은색 사선이 프린트된 노란색 박스 테이프를 불규칙적으로 뭉쳐놓았죠. ‘세상에서 가장 허망한 모빌’ 형태라고 할까요.”
박기원이 준비한 이번 여정은 모빌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2층 전시장, 더운 공기가 가득한 붉은 방에서 마무리된다. 빨간색 비닐과 LED 조명을 사용한 작품 ‘붉은 방’과 그것을 등진 채 관람객을 바라보는 푸른빛 회화. 그의 작품은 이렇게 공간 안에서 종국엔 잔잔하고 희미한 마침표를 찍는다.
작가가 고민하는 근본적 주제를 다양한 재료와 설치 과정으로 확장하며 미술에 시간성과 연극성을 포함시킨 박기원 작가. 관람객의 위치를 작업 중심에 놓는 방식을 활용해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 관람객이 작품을 경험하는 것 자체를 작품의 완성으로 보는 그에게 있어, 이 시간 붉은 방을 거니는 우리는 곧 작품이 된다. 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김춘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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