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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19 LIFESTYLE

돌, 바람, 여자 그리고 파인다이닝

  • 2019-03-31

제주의 삼다로부터 가장 동시대적이며 미래지향적인 파인다이닝 요리를 건져 올렸다.



돌, 청보리 관자와 물냉이 달걀
돌은 제주도의 정체성이자 향토, 그리고 예술의 집약체다. 제주도는 120만 년 된 방패 모양 화산에서 많은 양의 현무암질 용암류가 연속적으로 분출되고 퇴적되어 완만한 대지를 이루고 있다. 360개의 오름에서 분출된 현무암질 용암이 그 위에 고스란히 쌓였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이 주를 이루는 제주도에서 논농사가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향맥’이라는 향토 품종의 제주도 청보리는 오랫동안 제주 서민의 배를 채워주던 소중한 주식이었다. 제주도의 청보리 밭이 푸른 물결로 넘실대면 봄이 왔다는 증거다. 일반 보리에 비해 키도 두 배 정도 커서 그 존재감이 또렷한데,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흰 쌀에 비해 수분 흡수가 더디다는 특징이 있다. 밀리우의 총괄 셰프 폴 셈보시 셰프는 이를 영특하게 이용해 청보리 리소토를 만들었다. 보말 내장과 브라운 버터를 넣어 녹진하고 미끄러운 겉면과 달리 씹으면 거친 알덴테 식감으로 보리 특유의 구수한 향을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리소토 위에는 관자 카르파초와 레몬 캐비아를 올려 조화를 이룬다. 여기에 제주 최초의 증류주인 부드러운 고소리술을 더하면 미각을 다채롭게 열어주면서 입안을 말끔하게 정리해준다. 주로 돌 틈에서 자라는 물냉이는 본래 아열대성 작물이지만, 최근 온난화 현상으로 제주도에서도 재배하고 있다. 제주도 셰프에게는 새로운 도전이나 다름없다. 폴 셈보시 셰프는 훈제한 제주도 유정란에 서귀포 농장에서 직접 받은 물냉이를 갈아 벨루테 수프로 만들었다. 제주도 물냉이의 신선하고 알싸한 맛과 브라운 버터의 부드러운 맛이 어우러져 잔잔한 호수 위 물수제비같이 느껴진다. 제주도 특산품인 섬오가피로 만든 쌉싸래한 약 향의 술 ‘녹고의 눈물’을 입안에 한 모금 두르면 천상의 맛을 자랑한다.






바람, 아스파라거스 뇨키와 흑우
“지난봄 제주 가서 보고 온 노오란 유채꽃은 모로 누워 일어날 줄 몰랐다 노오랗게 기절해 있었다 모슬포의 유채꽃들은 그랬다 모슬포의 바람 탓이었다 모슬포의 바람이 어찌나 빠른지 정갱이도 무릎도 발바닥도 없이 달려만 가고 있었다 (중략) 추사 선생의 대정마을로 내려와보니 입 굳게 다문 채 제주사람들은 그 바람의 모진 내력들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_ 정진규의 시 ‘모슬포 바람’ 중. 제주도의 바람은 낭만보다는 맹렬한 질주나 절규에 가깝다. 거센 해풍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제주도 땅에서 자라는 재료는 강인해져야 했다. 그로부터 잉태하는 생명력이 있다. 온난화 현상 가운데 제주도에서 재배가 가능해진 유기농 아스파라거스도 그러한 질긴 생존력을 지녔다. 그럼에도 맛은 한없이 부드러우니, 아이러니다. 질긴 껍질을 벗겨 먹어야 하는 일반 아스파라거스와 달리 제주산은 껍질째 먹어도 식감이 부드럽고, 육즙이 풍부하며, 풍미가 진하다. 특히 생으로 먹는 아스파라거스는 기분 좋은 단맛을 내는데, 입안에서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을 내기 위해 셰프는 전분과 홀런데이즈 소스의 산미를 가미해 아스파라거스 뇨키로 만들었다. 아스파라거스 채즙 특유의 단맛과 걸맞은 오메기술을 곁들이면 풍미가 한껏 살아난다. 붉은 도화지에 흰 눈꽃이 내린 듯한 균형감 있는 마블링이 특징인 제주도 전통 소 흑우는 제주 바람을 이용해 웨트에이징과 드라이에이징한 뒤 요리했다. 바람 속에서 시간을 견딘 흑우는 맛과 향이 농밀하고 깊어지는데, 거기에 숯 향을 입혀 봄철 채소를 가니시로 올렸다. 함께 곁들일 술은 향이 은은해 흑우 요리의 맛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술과 고기 맛을 평행선상에 놓아 서로를 보완하는 제주 허벅술이 좋겠다.






여자, 수비드 전복
“해녀가 물질하는 날은 바다가 부드러운 날이다. 온화한 바다 빛깔이 물결 위로 넘실거리는 그런 날은, 어느 때보다 신선한 생선을 요리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든다.” 폴 셈보시 셰프는 매일 출근길에 일부러 해안도로를 지난다. 바다의 기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제주도 바다는 해녀들의 해산물 밭으로, 제주인이 일구는 삶의 터전이다. 제주도의 표상이자 삼다도의 상징, 그리고 정신이다. 바다에 잠수해 해산물을 캐는 일은 세계 곳곳에 있었지만, 직업인으로서 보조 장비 하나 없이 잠수일을 하는 나잠업은 제주도와 일본이 유일하다. 그들이 목숨 걸고 건져 올린 전복은 한때 전복 세금이라는 이름하에 공물로 바쳐야 했지만, 제주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 축복이었다. 제주도 전복은 흔히 아는 참전복에 비해 성장 속도가 더디고 거센 해류를 견뎌야 하기에 기운이 세다. 다소 억세다고 할 만큼 차진 식감을 자랑해 요리에서도 존재감이 강하다. 셰프는 밥맛이 구수한 돌솥밥에서 영감을 받아 수비드 전복 요리를 만들었다. 데친 근대에 전복을 올리고, 한우 카르파초와 캐비아, 비프 콩소메를 부어 마무리했다. 버터와 마늘, 타임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디시에서 해녀의 숨비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산뜻한 감귤 향의 제주도 전통술 니모메를 한 모금 머금고 수비드 전복 요리를 맞이하면, 혀가 전복을 감싸도록 안내자 역할을 해줄 것이다.

 

에디터 전희란(ran@noblesse.com)
사진 박현구   요리 & 푸드 스타일링 폴 셈보시(밀리우 레스토랑 총괄 셰프)   참고 서적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제주’ 편   도움말 김영백(해비치 호텔앤드리조트 제주 식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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