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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19 LIFESTYLE

어떤 재주로 제주에 사나요?

  • 2019-05-08

제주도에서 삶을 꾸려가는 열 한명의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재주로 제주도에서 살아가고 있나요?

자연의 주기에 따라 강길수 셰프
산들바람과 향긋한 풀 내음을 느끼고, 파란 하늘 아래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고, 반려견과 함께하는 산책길에 붉은 노을을 보며 여유로움을 느끼는 게 어쩌면 제주도에 정착한 이유일지 모르겠다. “자연과 하나 된 삶을 원했어요. 무작정 아내와 함께 제주도로 왔죠. 2년 정도 자유롭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제 직업을 살려 레스토랑 삐꼴라 쿠치나를 오픈했어요.” 그의 평소 꿈은 직접 가꾸고 재배한 식자재로 요리하는 것이었다. 제주도를 식자재 도감 맵으로 정리한 그다운 생각이다. 신선한 재료에 제주만의 특색을 넣어 만든 음식을 손님에게 선보일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그를 설레게 한다. 강길수 셰프는 제주도 생활을 시작한 뒤 도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매일 아침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한다. “지금은 코어를 단단하게 다지고 있어요. 아내와 대화도 많이 하고, 둘만의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 중이죠. 그러다 보니 돈이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그저 농부의 삶처럼 자연의 주기에 맞게 흘러가면 되는 것 같아요.” 더 이상 시간에 쫓기거나 남에게 치이는 삶은 없다. 그가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생각한 대로 살면 되니까. “제주도 생활의 만족도는 200점이에요. 더 일찍 오면 좋았을걸, 생각할 정도로요. 일할 때는 온전히 집중하고, 쉴 때는 제주도를 마음껏 즐깁니다. 혹시 제주살이를 계획 중이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오면 좋을 것 같아요. 큰 용기도 필요 없습니다. 어디에 있든 마음가짐이 중요하니까요.” 사진 안연후

강길수가 사랑하는 제주 풍경
협재해수욕장과 금릉해수욕장 사이에 위치한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아 아지트로 삼기 좋고, 바다를 붉게 적시는 석양 또한 예술이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바다 정석병 공간 디자이너
“제주도 사람들은 자기 영역의 예술가 같아요. 집에 가보면 각자의 개성과 특색이 그대로 묻어나죠. 직접 망치질하고 페인트칠해 만든 집, 식당이나 카페 같은 공간을 보면 참 재미있어요. 자기 것을 하니까 과감해지고 없던 표현력도 생기나 봐요. 생각지 못한 컬러도 대담하게 쓰는 걸 보면서 오히려 제가 배워요. 그들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제가 볼 땐 다 디자인이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영감을 받곤 하죠.”
상업적 공간 디자인과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이란 조립 모듈을 이용한 설치미술 작업을 겸하는 정석병이 제주도에 정식으로 터를 잡은 건 작년 일이다. 그 전까지는 길고 짧은 여행을 겸해 수시로 드나들며 제주도에 이주한 배우, 셰프, 디자이너, 아티스트, 민박집 주인과 자유롭게 교류했다. “제주에 뭘 하러 왔냐고요? 아무것도 안 하러 온 건데.” 제안서 작성과 미팅의 연속으로 정작 본업무에는 집중할 수 없던 서울에서의 삶은 공간 디자이너에게 숙명이자 권태였다. 사진을 찍고, 전시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던 일상이 와해되었고 더 이상 뇌에 바람이 들지 않았다. 영감의 하수구는 막혀버렸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찾아 제주도로 왔다. 노트북을 펴고 디자인하는 일상은 변함없지만, 노트북 너머에 제주 바다가 있다는 점이 달라졌다. 언제든 노트북을 접고 나가면 그의 동력을 채워줄 바다가 묵묵히 기다린다. 그가 꿈꾸던 삶의 풍경에 가장 가까운 ‘꽃신민박’이 있는 근처에 집도 마련했다. “사실 별로 달라진 건 없어요. 제주도에서도 밤새 일하거든요.(웃음) 아까도 화상으로 미팅했고요. 그래도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 건 분명한 소득이에요. 누워만 있어도 뭐라 하는 사람 없으니까.(웃음)” 언젠가 사고가 유연해졌다고 생각되면 불현듯 떠날지도 모를 제주도. 정석병은 오늘도 방 안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면서 제주도를 그의 식대로 마음껏 누리는 중이다. 사진 박현구



정석병이 추천하는 제주 공간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사람이 현실에 있구나.’ 정석병은 처음 꽃신민박에 묵을 때 주인의 삶을 관찰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꽃신민박은 셰프이기도 한 주인의 요리 솜씨가 탁월해 조식 맛집으로도 유명하다. 오두막에서 내려다보는 뷰가 아름다운데, 이곳에선 어쩐지 햇살도 더 찬란하게 내리쬐는 듯하다.






고마운 풍경 현재웅 기업가
한라산 소주는 제주에서 4대를 이어온 유일한 향토 기업이다. 밤문화라곤 전무한 제주에서 소주는 일터로부터 돌아왔다는 증거였으며, 일상의 위안이자 유일한 유희였다. 창업 이후 69년 동안 한라산 소주는 얼마나 많은 서민 삶의 장면에 놓여 있었을까. 6년 전 4대 경영자 자리에 오른 현재웅 대표는 그 고마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신공장은 그 고마운 마음으로 써 내려간 편지다. “공장을 새로 지으면서 고민한 것 중 하나가 도민에게 개방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회사의 가치나 역사, 제작 공정까지 투어 코스로 볼 수 있게 해 소주 너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거든요.” 도민조차 대기업쯤으로 인식하는 한라산은 사실 직원 수가 80명 남짓한 중소기업이다. 직원 대부분 제주도 사람인데, 공장 투어 마지막에는 20년 이상 근속한 뒤 퇴직한 직원들의 사진을 벽에 걸고 그들이 헌정한 삶을 기린다. 뿌리 깊은 제주 DNA를 지닌 현재웅 대표는 그동안 개발과 인기로 급변해온 제주도를 관망하며 감회가 새롭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관심을 가지면 대기업이 따라와요. 이 과정에서 제주가 기반인 사람과 토착 기업이 지켜져야 하는데, 사실 그동안 대기업은 이익만 챙기고 떠나기에 바빴죠. 제주도에서 취한 것이 있다면 제주도를 위해 어떤 일을 할지 고민했으면 해요. 저 역시 많이 노력해야죠.” 한라산 소주는 한국연구원이 발표한 국민지역총생산대비 제주에서 지역 환원을 가장 많이 한 기업으로 꼽힌다. 그러는 한편 다수의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열린 시선으로 제주도를 바라보고, 이주민을 배척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한라산 소주가 육지로, 해외로 자연스럽게 퍼져나가는 이유다. 한라산 오리지널을 비롯해 올래, 고급 증류주 허벅술까지 포트폴리오를 늘리며 힘을 보태고 있다. 제주도에 늘 감사하는 대표는 지인이 신공장을 방문하면 무조건 5층 옥상으로 데려간다. 서쪽으로는 비양도, 동남쪽으로는 한라산을 조망할 수 있는 옥상에는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은 제주도 풍경이 담겨 있다. 사진 박현구

현재웅이 걷는 제주 길
위미항을 낀 올레길 5코스를 자주 걷는다. 끝도 없이 이어진 돌담 너머 제주 바다가 근사하게 펼쳐진다. 영화 <건축가개론>에 등장한 ‘서연의집’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설레거나 혹은 고독한 일상 김선유 DJ & 유길상 바텐더
김선유와 유길상은 메종 글래드 제주의 바 정글북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다. DJ 산도로 활동하는 김선유는 음악을 틀고, 바텐더 유길상은 제주도의 맛을 담은 칵테일을 만들어낸다. 이주자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서로가 바라보는 제주는 달라도 참 다르다. “제주도 삶의 점수요? 90점 이상이죠. 낮에는 오설록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2년 동안 쉬던 DJ 일을 다시 시작했어요. 낚시, 골프까지 제가 좋아하는 건 다 있어요. 서울에서는 좋아하는 걸 하다가도 늘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강박이 있었거든요. 여기서는 달라요. 할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것도 하고, 마음이 참 편해졌어요.” 새벽에 낚시를 마치고 양옆으로 녹차밭이 펼쳐진 길을 따라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해 또다시 밤낚시를 즐기는 일상. 바에서는 딥하우스, 칠아웃, 테크하우스 등 음악을 틀며 삶에 경쾌한 비지엠을 불어넣는 하루하루. “큰 욕심 없이 지내면 한국에서 이런 곳은 다시없을 거 같아요.” 반면, 유길상의 삶은 조금 다르다. 청담동 앨리스 바에서 일하던 그는 퇴근 후 날짜가 바뀐 시각에도 여전히 반짝이던 서울의 삶이 익숙했다. 홀로 바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라운지에 가고, 혼밥을 즐기던 그에게 제주도의 밤은 너무도 길다. 밤 10시만 되면 스위치가 완전히 꺼지는 칠흑 같은 도시에서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고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무렵 만난 것이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별을 또렷하게 본 적이 없어요. 군대에서조차요. 제주에서 별이 채워진 하늘을 바라보면서 자연에 새삼 눈떴죠.” 오로지 일하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온 유길상에게 이곳에서의 삶은 여전히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한데 기대하지 않았기에 발견하는 제주의 매력이 싫지 않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보며 불현듯 가슴 설레는 어떤 순간처럼. 사진 박현구

김선유가 추천하는 제주 낚시터
모슬포 옆 영락리에서는 낚싯대만 던지면 바로 물 정도로 고등어가 잘 잡힌다. 해지기 2시간 전쯤 자리 잡고 있으면 고등어를 비롯해 희귀종도 많이 잡을 수 있다. 물론, 그 맛도 끝내준다.







유길상이 생각하는 제주의 맛
정글뮬은 열대 과일과 신선한 향신료로 맛을 살린 칵테일로 최근 정글북에서 시그너처로 새롭게 선보인 메뉴다. 좀 투박하지만 생강의 알싸하고 매콤한 맛이 기분 좋게 퍼져 휴양지 기분을 한껏 낸다.






내려 놓으면 보이는 낭만 강건우 바버 디자이너
제주도에서 태어난 강건우는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상경했다. 헤어 디자이너로 진로를 결정했지만, 여자 머리를 기본으로 하는 일은 그다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 무렵, 이발병 보직으로 해군에 입대했다. 바리깡을 기본으로 하는 보편적 군인 머리와 달리 해군은 주로 가위를 써야 했다. 이발소가 자리한 군함에서 근무하며 보름 가까이 해상에서 군인들의 머리를 잘라줬다. 칭찬도 많이 들었고, 보통 병들에게 머리를 맡기지 않는 장교와 부사관도 그를 찾았다. 그때 남자 머리를 다듬는 일이 마음에 들어 전역 이후 서울에서 바버숍에 근무하게 됐다. 마침 그가 근무하던 숍은 제주점 오픈을 앞두고 있었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제주도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 살아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어요. 제가 일하는 곳은 제주시에 위치해 서울과 많이 다르진 않아요. 대중교통이 편하지 않다는 게 조금 아쉬울 뿐이죠. 날씨 변덕이 심하지만 좋은 날은 또 너무 좋아요. 어딜 가도 환상적이죠. 날씨가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날씨가 마음에 큰 위안을 주기도 하거든요.”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삶의 여유다. 제주도에 오자마자 덜컥 구입한 바이크는 삶에 낭만을 불어넣었다. 휴무에 날씨가 좋으면 목적지 없이 바이크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린다. 일상은 도시에서의 삶과 비슷하지만, 주중의 이런 여유와 낭만 덕분에 서울살이가 더 이상 그립지 않다. “손님 중엔 저처럼 육지에서 내려온 분이 많아요. 제주도의 아름다움과 낭만만 생각하고 내려왔다가 얼마 안 되서 다시 올라가는 분도 많이 봤습니다. 제주도의 삶을 외롭다고 말하는 이도 보았고요. 하지만 조금 내려놓고 살면 낭만은 훨씬 가까이 있어요. 저 역시 부모님이 다시 제주로 내려오시면 아예 정착할 생각입니다.” 사진 김참



강건우가 사랑하는 제주 바이크 코스
제주시에서 산방산 방향으로 이어진 해안도로는 늘 뻥 뚫려 있다. 곡선 구간이기에 느긋하게 연결된 도로를 달리며 바다를 만끽한다.






무한한 가능성의 섬 김지윤 스타트업 CEO
사업을 시작하며 2년 동안 서울과 제주도를 오갔어요. 그러다 문득 제주도에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지윤은 2014년부터 스타트업에 발을 들였다. 창업 멤버로 일을 시작한 곳도 있었고, 이후 에어비앤비 컨설팅을 위한 회사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지난해 초 호스텔 브랜드 베드라디오를 구상하고 5월부터 동업자와 본격적으로 사업을 준비했다. 올 1월에는 제주 창조개혁혁신센터의 투자 유치를 받아 4월 베드라디오를 오픈한다.
“이전 제주 한 달살이 프로젝트를 운영한 경험 덕분에 가장 잘 알고 있는 시장이 제주도였어요. 특히 구제주는 재생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지역이기에 우리 사업 방향성과 맞는다고 생각했죠. 호스텔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최적의 지역이라 생각했거든요.” 구제주에 위치한 베드라디오 맞은편엔 산지천이 위치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동네 사람들이 빨래를 하거나 정보를 공유하던 커뮤니티 공간이다. 이곳에 살던 이들이 지금은 신제주로 많이 옮겼지만, 이 칠성로 부근은 제주에서 나고 자란 20~30대의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김지윤 대표는 구제주야말로 제주도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생기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는 믿음이 있다.
“발전 가능성이 있는 유효 공간이 많은 곳이에요. 현재 제주도에서는 이곳저곳 ‘찾아다니는 여행’이 트렌드지만, 전 도심 지역 입지가 전략입니다. 배후 수요가 없으면 사업 유지의 기복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대신 편리한 도심의 매력과 제주도의 젊은 사람들이 여행객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제주 도민과 여행자가 함께 어우러지는 재미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특히 제주도 관광 발전 단계를 보면 나이트라이프가 아직 미비해요. 발리 또는 방콕 여행을 하다 보면 릴랙스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클럽이나 야시장도 찾잖아요. 제주 도심은 충분히 가능성을 지닌 공간이죠. 물론 올레길 18코스를 걷거나 사라봉 오름에 올라 일출을 볼 수도 있어요.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제주항도 가깝고요.”
제주도에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이야말로 그의 삶에 원동력이 된다. 지역 커뮤니티를 의미하는 제주도의 ‘괸당 문화’ 때문에 원주민과 쉽게 어우러지기 힘들다는 인식이 있지만, 아직 그에게 그런 경험은 없었다. 오히려 제주도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청년에게 응원을 보내는 이가 더 많았다. 덕분에 그가 베드라디오를 통해 하고 싶은 일도 마르지 않는다. 제주항에서 당일 수급한 우럭으로 매운탕을 내주는 근처 식당과 조식 패키지를 구상하거나 숙박객이 제주 젊은이의 러닝 크루에 참여하는 체험 프로그램도 계획 중이다. 제주도를 새로운 관점에서 발견하고 기획하는 즐거움으로 그의 제주 생활은 순항 중이다. 사진 김참

김지윤이 즐겨 찾는 제주의 맛
편리함과 도심의 매력을 지닌 구제주. 수제 맥주로 유명한 탑동의 맥파이, 사케 소믈리에 사장님이 추천하는 사케와 맛있는 안주를 먹을 수 있는 이자카야 미친부엌을 추천한다. 1인분으로 내오는 신해조식당의 우럭 매운탕 역시 간밤의 숙취를 지우는 완벽한 해장 음식이다.






목가적 풍경 고상무 목사
섬에서 걷는 것을 좋아한다. 시간이 날 때면 목적지 없이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아본다. 느린 템포로 하늘과 돌담, 들꽃과 바람에 부유하는 나무를 바라본다. 이곳은 지루할 틈이 없다. 사시사철 혹은 하루하루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이맘때면 완만한 언덕에 자란 잡목과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 풍경이 좋다. 다음 계절엔 울창한 숲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의 줄기가 놀랍다. 그런 매력에 제주도를 다시 찾았다. 고상무 목사가 제주도와 연을 맺은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 생활을 시작했어요. 말도 다르고, 흙도 까매서 외국에 온 줄 알았어요. 그런 거리감이 있었어요. 여전히 ‘제주 사람’이라 말할 순 없지만, 아직도 제주도에 놀라고 감탄해요. 여기엔 그런 ‘맛’이 있어요.” 고상무 목사는 성인이 된 뒤 육지로 나가 도시 생활을 했다. 패션 전공을 살려 중국을 상대로 무역업을 하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새벽에 일어나 빌딩 숲으로 출근하기 위해 사람들 틈에 끼어 지하철로 이동했다. 그 무렵 ‘조금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막연히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신앙과 유유자적한 삶을 택했다. 그 무대로 제주도가 딱이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요. 먹고 사는 문제, 환경을 바꾸는 하나하나가 모두 고민이었죠. 서울 말곤 살아본 적 없는 아내에게도 큰 결정이었어요.” 유년기를 보낸 곳이라지만, 제주도가 ‘제2의 고향’ 같은 느낌은 아니다. 이곳 사람들은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이방인 같은 쓸쓸함에 외지인이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얻은 게 더 많아요. 아내는 여전히 시행착오를 거듭하지만, 둘 다 만족하고 있어요. 가장 좋은 건, 아침 일찍 일어나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거예요. 해안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제주도의 오늘 모습을 확인하죠.” 고상무 목사는 현재 제주시청 근처에서 작은 개척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신도는 10명 남짓, 대부분 20~30대 젊은 외지인이다. 교회 이름은 ‘한 교회’. “제주도는 이제 다양해요. 외지인, 외국인, 토착민 그런 여러 문화가 섞인 이국적인 공간이에요. 그런 것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작게나마 하고 싶어요.” 사진 최민석



고상무가 꼽는 제주 일출 포인트
제주도 남서쪽에 위치한 얕은 산 ‘수월봉’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이곳의 보물이다. 끝없이 펼쳐진 바닷속으로 붉은 해가 잠기는데, 구름과 푸른 하늘까지 모두 황금빛으로 물든다. 일몰 시간은 짧지만, 압도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계절마다 풍경이 미묘하게 달라 시간이 날 때마다 수월봉에 오른다.






길이 열려 있는 공간 김현철 카페 대표
4년 전 제주도에 내려온 김현철에게도 평범한 도시 생활의 기억이 있다. 연구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이후에는 공연과 축제를 기획한 것. 밥벌이의 스트레스는 자연에서 해소했다. 주말에는 무조건 자연으로 향했고, 일이 없는 날엔 사나흘씩 자연에 머물렀다. “생활이 지지부진하고 뭔가 새롭게 결정해야 할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확신을 얻었어요. 자연과 최대한 가까이에서 살아야겠다고. 어디든 함께 다니는 개가 한 마리 있는데, 그 친구에게도 도시는 적합하지 않았죠. 그래서 함께 제주도로 오게 됐어요.” 도시살이에는 남의 손을 빌리고 승인을 거쳐야 하는 일로 가득했다. 제주살이를 결심한 김현철 대표는 하고 싶은 일만 하자 마음먹었다. 돈과 열정, 에너지로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을 그렸다. 마치 내가 산 도화지에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 비유했다. “친봉산장이 있기 전 이곳은 원래 마구간이었어요. 6개월 동안 찾아 헤매다 발견한 장소죠. 3개월 정도면 혼자서 만들 수 있을 거란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어요. 두배는 더 걸렸네요. 1000만 원 어치 장비를 샀지만 공사 지식이 없어 뭐든 배우면서 시작했죠. 여물통을 깨부수는 것이 시작이었는데, 그 일만으로 신발을 바꿔 신어야 할 정도였어요. 손가락이 잘릴 만큼 큰 사고도 있었고요.” 4년간 켜켜이 다진 이 공간에서 만난 손님은 많은 인연으로 이어졌다. 여전히 제주도에서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겨날 만큼 생활도 안정을 찾았다. 최근에는 제주도에서 만난 인연과 힘을 합쳐 카페와 갤러리, 펜션이 공존하는 새로운 공간을 준비하고 있다. 분주한 일상에도 한 뼘에 닿는 자연과 친구들은 여전히 그에게 위안을 준다. 지인들과 함께 제주도에는 흔치 않은 계곡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흐르는 색달천이나 중문천을 거꾸로 추적해 자신만의 ‘선녀탕’을 찾는 모험 같은 일도 있다. “즐겁게 살려고 내려왔으니 재미있게 살아야죠. 수치적으로 비교하면 삶은 어디든 팍팍해요. 그런 마음만 정리된다면 제주도에서 길은 열려 있어요. 생활의 이벤트는 자신의 몫이니까요.” 사진 김참

김현철이 사랑하는 드라이빙 코스
귤꽃이 필 무렵, 달달하고 상큼한 향기로 가득한 봄의 제주도를 좋아한다. 꽃이 핀 제주도의 봄을 만끽하고 싶다면 한라산 영실 코스를 따라 만발한 꽃을 보고 어리목 코스로 내려가며 한라산 남쪽 바다를 볼 수 있는 드라이브를 추천한다.






속마음을 털어놓는 기묘한 정류장 김지헌 셰프
시작은 제주도 ‘한 달살이’였다. 고향 근처인 전주에서 셰프인 본업을 살려 레스토랑을 열려던 계획은 제주에서의 한 달살이가 완전히 전복시켰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싶었어요.” 김지헌 셰프가 본업인 요리를 잠시 내려놓고 제주도에서 매일 아침 빵을 굽는 데는 사연이 있지만, 사실은 사람이 좋아서다. 사람들과 나누는 꿈,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어떤 형태로든 가둬두고 싶었다. 그것이 책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진 건 나중 일이다. 진짜 ‘대화’를 나누기에 제주는 더없이 멋진 무대였다. 공허한 질문과 대답만이 넘치는 건조한 세상에서 제주도는 마음을 터놓고 진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대였다. 낯선 사람에게 불쑥 말을 건네도 괜찮을 것 같은 기묘한 정류장.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꿈이 뭔지 물었어요. 사람들이 꿈을 이야기할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거든요. 굉장히 설레는 표정의, 반짝이는 그 찰나를 보는 게 좋았어요. 스스로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질문도 던졌죠. 이를테면, ‘당신의 최악의 하루는?’, ‘인생의 솔(soul) 푸드는?’ 현실에 안주하면 생각할 수 없는 가치,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그 결과는 독립 출판 형태의 책에 담았다. 직접 사진도 찍었다.
제주도에 뿌리내린 지 2년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때와는 또 다른 차가운 현실에 맞닥뜨린다. 제주도 삶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지척에서 보면 치열한 현실뿐인 오징어 배 떼’에 비유한 그는 한편으로는 제주도라 안도하는 풍경에 대해 미소를 반짝이며 말한다. “퇴근길에 보는 노을이 참 아름다워요. 한번은 그 풍경을 놓쳐서 굉장히 아쉬웠는데, ‘아 내일 또 보면 되지!’ 하는 안도감이 들더라고요. 제주살이가 행복하냐고요? 물론 행복하죠. 그런데 동시에 아주 힘들어요. 지나치게 행복해도 힘들 것 같고, 딱 이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아요. 뭐든 잔잔한 게 좋잖아요.” 사진 박현구

김지헌의 소중한 제주 풍경
길게 이어진 함덕해안에는 방파제, 해수욕장이 3개 있다. 구간과 구간 가운데에 잔디공원이 있는데, 굉장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밤바다를 바라보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순간이 소중하다.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난 나라 김병걸 편집숍 대표
서울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제주도로 이주한 김병걸은 이후로도 늘 제주에 있었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지만 그의 친구들은 의류를 전공하거나 옷을 팔았다. 그 역시 옷이 좋아 우연한 기회에 일을 배우게 됐고, 누군가에게 멋을 전하는 일은 그에게 천직이었다. “해브유에버에서 고객을 만날 때면 레이블이 아닌, 분위기를 사라고 이야기해요. 매일 감정이 다르잖아요. 우울한 날도, 밝은 날도 있죠. 상대에 대한 정보가 없더라도 입는 것으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게 바로 옷이에요. 그걸로 진정성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의 감각과 철학을 전하기에 제주도는 물론 한정적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 남아 어떤 세대와 공존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시간이 지난 뒤 누군가 제주도에 멋진 가게가 있었다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론 의미가 없잖아요. 나처럼 좋아하는 일을 택한 어린 친구들에게도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한 좋은 영향력을 미치길 기대하면서 계속 열심히 하는 거죠.”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점도 그를 제주도에 머물게 하는 원동력이다. 작년 여름부터 알게 된 서핑의 맛은 비수기 때 가게를 지키는 동생들과 바람을 쐬기 위해 근처 바다로 나온 것이 계기였다. 차로 10분 남짓 달려 도착한 아담한 해변은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아 조용하고 한적했다. 함께 일하는 이들과 멍한 시간과 공간을 지키는 것보다 해변에 누워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일, 파도를 타는 일의 재미도 일깨워주고 싶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잠깐씩 내려놓으면 나만의 쉼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죠. 덧셈과 뺄셈으로만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인간 관계도 있어요. 숫자상 손해를 보더라도 그 관계가 소중하면 그게 더 값진 거니까요.” 그는 제주도의 사계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 제주도에서 즐기는 최대치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가도 마음만 먹으면 바다로 뛰어들 수 있다는 사실이 삶의 활력소가 되어준다. 언제까지 뛰어야 할지 모를 땐 힘들지만, 목적지가 정해진 달리기는 덜 힘들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혼자만의 시간과 지루함을 무엇으로 채워 넣느냐에 따라 제주도의 삶은 달라진다. 지루함이라는 틈을 무엇으로 채워 넣느냐가 그가 생각하는 좋은 삶의 기준이다. “제주도는 제게 행복한 나라예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면 얼마든 새로운 인연이 열려 있고, 시간의 틈을 즐길 거리도 다양하죠. 누구나 자기만큼의 지옥을 짊어지고 산다고 하잖아요. 시간의 속박에서 조금 내려놓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 제주도는 천국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진 김참

김병걸이 좋아하는 제주 새벽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는 성판악휴게소로 간다. 선루프를 열고 쳐다보는 새벽 하늘엔 별이 가득하다. 타지에서 손님이 오면 굳이 고급 식당을 고집하지 않는다. 회센터에서 회를 뜬 뒤 좋아하는 방파제 스폿을 찾는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틀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부는 곳에서 회 한 점과 소주를 걸치면 그곳이 지상낙원이다.

 

에디터 <노블레스 맨> 편집부
장소 협찬 단정한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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