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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19 FEATURES

이 계절의 황보라

  • 2019-02-28

옅은 초록이 짙은 녹음으로 번진다. 성긴 숲의 틈이 메워지고 풀벌레가 잦아든다. 잡목이 자라고 생애 가장 찬란한 시간이 펼쳐진다. 늦봄과 초여름 사이, 황보라는 거기에 있다. 봄볕의 편안함과 만개하려는 여름의 생명력이 담겼다. 지금 이 계절의 황보라는 가장 생생하다.

재킷 Y’s, 허리의 로프와 쇼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유난히 좋은 봄이다. 이 계절을 만끽하고 있나? 대부분 현장에 있다. 지난겨울부터 시작된 촬영이 곧 막바지다. 그래도 봄의 좋은 건 충분히 즐기고 있다. 매일 만 보씩 걷다 보면 벚꽃이나 나무에 튼 움, 포근한 볕 같은 걸 볼 수 있다. 이제 곧 여름이 오겠지. 그걸 기다린다.

꾸준히 걷는 것 같다. 꽤 오랫동안. 횟수로 4~5년쯤 됐다. 걷기가 주제인 프로그램을 만난 인연으로 시작했다. 이젠 주위 사람들에게 걷기를 전파하는 전도사 다 됐다.(웃음) 그만큼 좋으니까. 일단 건강에 좋다. 척추측만증이 심했는데, 지금은 상당히 좋아졌다. 다이어트는 물론이고. 차를 타고 이동할 때 놓쳤던 소소한 풍경도 볼 수 있다. 지금은 20명 남짓한 크루와 함께 매일 걷는다. 하루 만 보 걷기가 목표인데, 도달하지 못한 멤버에겐 500원부터 만 원까지 벌금이 있다. 그렇게 모은 게 이제 곧 1억 원이 된다. 좋은 곳에 사용하려 한다.

일찍 배우가 됐다. 2003년에 S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애초에 내겐 공부 머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하느님이 어떤 ‘달란트’를 주셨을까 고민했다. 생각해보니 막연히 스타가 되고 싶더라. 얼마 전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02학번 모임에 나갔는데, 입학식 때 이야기가 나왔다. 선배들이 “넌 여기 왜 들어왔어?”라고 물었는데, 난 배우나 연기자가 아니라 “스타가 되고 싶어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더라.(웃음) 그땐 멋모르고 유명해지고 싶었다.

올해로 데뷔 17년 차 배우다. 처음엔 10년 정도 하다가 안 되면 그만두려 했다. 그런데 이 일엔 묘한 매력이 있다. 나는 완벽한 박애주의자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이 일도 결국엔 사람과 하고 사람을 위해서 한다. 그 게 재미있다. 작품을 할 때마다 누구를 만나 논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힘을 받으니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책임감도 있다. 내 이름을 걸고 하는 만큼 오롯이 내가 모든 걸 감수해야 한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공백이 없다. 배우가 그러기 쉽지 않다. 성실해야 하고 운도 좋아야 한다. 무엇보다 황보라를 찾는 사람이 계속 있어야 한다. 지치지 않나? 감사한 일이다. 근래엔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 이후 찾아주는 분이 많다. 매일 감사히 여긴다. 지치지 않는 건 잘 비워내기 때문이다. 내가 걷기를 선택한 이유다.(웃음) 스트레스를 받고 과부하가 오면 비워내고 단순해져야 한다. 걷다 보면 원초적으로 변하고 생각이 심플해진다. 일단 배가 고프니 뭐든 먹고 싶다. 힘드니 쉬고 싶다. 몸을 혹사하면 단련도 되고 맑아지는 쾌감도 있다. 배우란 직업 자체가 기다림과의 싸움이다. 현장에서 대기가 길어지면 나가서 걷는다.

꾸준히 성장한 배우다. 단역부터 조연, 주연까지 계단을 차곡차곡 밟았다. 하인1 역할부터 시작했으니까. 처음엔 스태프와 같이 버스로 이동하고 대기실이 없어 한겨울에도 밖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이젠 그런 게 다 소중한 기억이고 자산이 됐다. 요새 더 강하게 드는 생각은, 주위를 환기해야 한다는 거. 나를 위해 모이고 애써주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 더 잘해야 한다. 현장에서 밝고 씩씩하게 행동하고 먼저 인사하려 한다. 그래야 나도 힘이 난다.

슬럼프는 없었나? 슬럼프는 늘 있었다. 특히 이미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코믹한 캐릭터 위주의 배역이 들어오는 게 싫었다. 정극을 하고 싶은데, 시트콤이나 CF 때 이미지를 벗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작품을 고사했다. 그러다 보니 일이 줄더라. 결국엔 배가 고파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윤여정 선생님 말씀처럼, 배우는 배고파야 되는 것 같다.(웃음) 이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대중이 내게 기대하는 걸 하는 것도 의무라고 생각한다.






화이트 니트 톱과 블랙 팬츠 Proenza Schouler, 후프 이어링 1064Studio.

개인적으론 <좋지 아니한가>에서 보여준 연기가 좋았다. 그런 캐릭터가 잘 맞는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독특한 세계관에서 황보라는 빛을 발한다. 엉뚱하지만 과하지 않다. 영화 <다찌마와리>와 <라듸오 데이즈>도 그랬다. <좋지 아니한가>는 내게 젊은 영화다. 그때의 풋풋함, 자신감 같은 걸 떠올리게 한다. 감독님이 아니면 그렇게 연기하지 못했을 거다. 그때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배우병에 걸렸다.(웃음) 혼자 연기 잘하고 연기에 대해 진지하다는 이상한 착각에 빠져 작은 역은 안 하려고 했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슬럼프가 아니었나 싶다.

참여한 작품을 보면 비중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아주 잠깐, 철없을 땐 그게 중요했다. 지금은 좋은 작품이면 비중에 상관없이 하려고 한다. 평생 가져가야 할 배우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들은 모두 그렇게 연기를 한다. 그걸 보고 많이 느꼈다.

이제 현장에서 서열이 꽤 될 연차다. 그게 너무 신기하다. 워낙 어릴 때 일을 시작해서 항상 막내였는데, 어느 순간 ‘왕언니’가 됐다.(웃음) <김비서가 왜 그럴까> 때도 맏언니였고, 지금 촬영 중인 드라마 <배가본드>에서도 상위에 있다. 그러다 보니 돈이 많이 나간다.(웃음) 이제는 그런 나이가 됐다.

황보라는 데뷔 초 모습처럼 생생하고 좋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배우다. 그런데 성숙한 느낌이 추가됐다. 뭔가 차분해졌다고 할까. 더 차분해져야 한다. 아직도 한번 업되면 쉽게 내려오지 않는다.(웃음) 아무래도 나이를 먹다 보니 여러 가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철들어 보이나 보다. 이젠 연기가 편하다. 작품과 호흡하는 걸 조금은 알게 됐다. 전엔 내 것만 잘하고 싶었다. 그 부담감에 혼자 겉돌았다. 지금은 연기가 작품의 이런저런 것들과 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들숨과 걸음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

예능에서 황보라의 모습이 그렇다. 밝고 긍정적인데, 속도 깊어 보인다. 어릴땐 예능을 잘 못했다. 무조건 잘하려고만 해서 남의 애기가 들리지 않았다. 이젠 사람들을 본다. 스태프와 출연진. 그들과 자연스레 호흡하다 보면 본모습이 나온다. 그게 나니까. 보는 분들도 편하게 느끼는 것 같다. 전엔 작품을 할때 다른 걸 많이 봤는데, 이젠 사람만 본다. 아, 저 사람이랑 이걸 해보고 싶다하는 생각이 들면 그냥 한다. 이젠 어떤 경계나 잣대가 사라졌다. 이래서 나이먹는 게 무섭다.(웃음)

공개 연애를 오래 했다. 어떤 기사에서 연애와 결혼에 대한 질문에 “내 나이가 서른일곱이다”라고 답한 부분을 봤다. 많은 의미가 담긴 말 같다. 서른일곱이니까, 확실히 전과는 다르다. 이젠 좀 더 솔직하고 편하게 살고 싶다. 오빠가 많은 부분을 참아줬다. 여기서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 난 같은 직종의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부딪히는 부분이나 스트레스가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애 초기에 “난 오빠가 배우 하는 거 싫다”고 말했다. 당시엔 자의식이 너무 강해 나를 자신보다 더 사랑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그때 오빠가 “나보다 네가 배우로서 빛나야 할 사람이야”라고 말하고는 배우를 그만뒀다. 물론 100% 이유는 아니겠지만, 그 부분이 너무 고맙다. 그래서 회사에도 들어간 거고.(웃음) 이젠 대표님과 함께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

여름을 닮았다. 생기 있고 에너지 넘치고. 이제 곧 여름인데, 무얼 준비하고 있나? 항상 여름을 제일 좋아했다. 뭔가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계절이다. 이번 여름엔 <배가본드>를 잘 마무리 지은 뒤 차기 작품을 준비할 텐데, 아마도 드라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유튜브에 전용 채널을 하나 개설할 예정이다. 주제는 워킹. 갑자기는 아니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걷기의 유용성, 함께 걷는 즐거움 같은 걸 최대한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사진 김성용   스타일링 박선용   헤어 허효진(에스휴)   메이크업 홍명연(에스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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