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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19 LIFESTYLE

매혹적인 레진

  • 2019-03-08

레진은 유연하다. 구현하는 모양과 색상에 한계가 없고, 그 어떤 소재와도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아트 퍼니처 분야에서 레진이 주목받는 이유다.

1 사비너 마르설리스의 레진 가구를 설치한 버버리 매장.
2 선명한 컬러감과 볼드한 디자인이 매력적인 마사 스터디의 프라임 컬렉션.

지난해 8월, 미국 뉴욕과 LA에 위치한 버버리 매장의 F/W 컬렉션 런칭 현장. 그곳엔 주연 못지않게 빛나는 조연이 있었다. 네덜란드 출신 디자이너 사비너 마르설리스(Sabine Marcelis)가 제작한 코트 랙과 벤치가 그 주인공. 브랜드의 시그너처인 베이지색 타탄체크를 입은 이 가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주하는 화려한 컬랙션 속에서 버버리의 변치 않는 클래식 아이덴티티를 전했다. 특이한 점은 ‘레진(resin)’을 사용했다는 것인데, 직사각형 프레임 안에 레진 용액을 붓고 그 위로 레진을 굳혀 만든 검은색과 빨간색 띠를 수직, 수평으로 겹쳐 쌓아 입체 타탄체크 패널을 만들었다. 펜디, 지방시 등 다수의 패션 브랜드와 협업해 레진 컬렉션을 선보여온 마르설리스. 그녀가 레진 소재를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합성수지 중 하나인 레진은 자동차, 항공기, 가전제품, 의료용 기자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토록 다양한 분야에서 사랑받는 데는 열과 충격에 강한 내구성이 첫 번째 이유로 꼽힌다. 나무나 금속, 콘크리트에 이르기까지 소재를 가리지 않고 뛰어난 접착력을 발휘하는 것도 다재다능한 쓰임에 한몫한다. 무엇보다 디자이너의 창작 욕구를 자극하는 것은 가공의 용이성. 사용하는 경화제에 따라 액체 혹은 반죽 형태로 만들어 자유롭게 성형할 수 있고, 투명한 소재라 표현할 수 있는 컬러가 무궁무진하다. 상온에서 빠르게 경화되기 때문에 가마에 넣어 굽거나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다. 물과 같은 제형인 우레탄 레진의 경우 경화 시간이 너무 짧아 문제가 될 정도라고 하니, 한 가지 작업이 ‘뚝딱’ 완성된다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다.
레진이 구현하는 선명한 컬러감은 심플한 디자인일수록 존재감을 발휘한다. 캐나다 디자이너 마사 스터디(Martha Sturdy)의 ‘프라임(Prime)’ 컬렉션처럼 말이다. 그녀는 숲과 바다, 정원에서 본 활기 넘치는 컬러를 가구에 담기 위해 레진에 특수 페인트를 섞어 빨강, 파랑, 노랑의 채도 높은 컬러를 완성했다. 원과 사각형 같은 기본 도형을 모티브로 볼드하게 풀어낸 디자인은 단색임에도 가구가 이토록 화려하고 세련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 가구가 답답해 보이지 않도록 색깔에 따라 레진의 투명도를 달리한 것도 특징. 스툴과 의자의 경우 하단 중앙에 철제 프레임을 숨겨두었는데,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며 위트를 더한다.




3 랑나 랑나르스도티르의 코럴 베이스와 그리트(Grit) 캔들 홀더는 겹겹이 쌓은 레진의 경계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냈다.
4 녹의 오묘한 컬러와 패턴을 디자인 요소로 활용한 유마 가노의 ‘러스트 하비스트’ 시리즈.

레진의 다양한 컬러에 공예적 요소를 더하면 아티스틱한 결과물이 나오기도 한다. 스톡홀름 디자인 페어에서 ‘2018 올해의 노르딕 디자이너’로 선정된 랑나 랑나르스도티르(Ragna Ragnarsdottir)의 ‘코럴(Coral)’ 베이스가 그중 하나다. 매끈한 표면 때문에 도자기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는 이 작품은 라텍스 몰드 안에 레진 용액을 붓고 굳히기를 반복해 만들었다. 산호에서 영감을 받은 청초한 컬러 조합도 아름답지만 층층이 쌓아 올린 색의 경계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낸 기법은 가히 환상적이다. 가장 밑에 있는 층에서부터 장엄한 산이 솟아오르기도, 경계가 맞닿은 두 가지 색이 어우러져 오묘한 뭉게구름을 펼쳐내거나 파도가 휘몰아치는 듯한 형상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 얼핏 동양의 산수화가 연상되기도 하는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속에 숨겨진 기묘한 설화를 상상하게 만든다. 같은 기법을 활용해 만든 캔들 홀더와 파티션도 공개했는데 “디자인, 예술, 장인정신의 접점에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그녀의 설명처럼 심미성과 실용성, 공예적인 아름다움까지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앞선 두 디자이너가 레진의 아름다움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일본의 유마 가노(Kano Yuma)는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실용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레진을 활용했다. 그의 ‘러스트 하비스트(Rust Harvest)’ 시리즈는 일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녹(rust)을 재조명한다. 철제 표면이 산화되며 생기는 패턴과 컬러가 하나의 디자인이 될 수 있음을 주목한 것이다. 유마 가노는 오랜 실험 끝에 금속판의 녹을 아크릴 레진 위로 옮기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레진 위로 옮긴 녹은 더 이상 산화되지 않고 금속판에 가려져 있던 녹의 뒷면이 투명한 레진을 통해 드러나며 행성의 토양을 관찰하는 듯한 신비로움을 선사한다. “인위적인 산화작용을 거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이 슬도록 했다. 수년의 시간을 거쳐 완성한 유일무이한 색과 패턴을 위해서다. 레진에 담긴 녹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듯한 착각이 든다.” 녹을 제거한 철판은 상태에 따라 또 한 번 산화작용을 거치는데, 이러한 과정이 마치 녹을 ‘재배(harvest)’하는 것 같다는 의미에서 시리즈 이름을 지었다.
혹자는 디자이너가 소재에 디자인을 입히는 주체인 동시에 소재가 지닌 가능성에 영감을 받는 객체라고 설명한다. 끊임없이 사물과 형태를 탐구해야 하는 디자이너와 소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의미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레진이 누군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한층 예술적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디터 최별(choistar@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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