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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19 PLACE

술 찾아 삼 만리

  • 2018-12-26

오직 술이 목적인 여행도 있다. 지역 특유의 정서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는 술이란 본고장에서 마시는 게 가장 맛있다. 술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6명의 이유 있는 술 기행 이야기.

김빠진 맥주를 찾아서, 영국 펍 크롤링
김빠진 맥주, 그건 바로 영국의 펍에서만 볼 수 있는 캐스크 에일(cask ale)이다. 에일은 세계적으로 많이 퍼져 있고 영국식 펍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빠진 에일은 영국에서만 볼 수 있다(혹시 아직 안 가본 어떤 나라에는 있는지 모르겠다). 캐스크(cask)란 술을 보관할 때 쓰는 통을 뜻한다. 캐스크 에일이란 열처리도 여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야말로 ‘생’맥주다. 탄산도 주입하지 않고 온도도 그저 서늘한 실온에 가깝다. 캐스크 에일이야말로 ‘생맥주’에 가장 가까운, 양조를 막 마친 날것 그대로의 맥주일 것이다. 맥주에 탄산을 주입해 마신 것은 고대 로마 때부터 시작된 맥주 역사와 비교해보면 얼마 되지 않는다. 샴페인처럼 병입할 때 설탕을 넣어 탄산가스를 만드는 건 가능했지만 가스 압력을 견딜 수 있는 통인 케그(keg)가 등장하기 전까지 생맥주는 그냥 캐스크통에 담겨 팔렸고, 여기에는 탄산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영국에서는 캐스크 에일을 리얼 에일(real ale), 즉 진짜 에일이라고도 부른다.
몇 년 전, F1 그랑프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 찾은 영국에서 맛본 김빠진 맥주의 충격은 두어 잔 정도 더 마신 다음,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네?’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라거라면 김빠진 맥주는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캐스크 에일은 적응할수록 입맛을 사로잡았고, 한국에 와서는 날것 그대로의 그 느낌이 종종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듬해 다시 한번 영국 그랑프리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을 때에는 경기장에 가기 전 이틀 동안 ‘펍 크롤링(pub crawling)’을 돌았다. 펍 크롤링은 어떤 지역에 갔을 때 그곳에 있는 펍을 돌아다니면서 한 잔씩 마시는 것을 뜻한다. 규칙은 간단하다. 한 펍에서 딱 한 잔만 마실 것. 그 이후로도 영국에 갈 일이 있으면 하루나 이틀은 시간을 내어 꼭 펍 크롤링을 했다. 오전 11시부터 시작해 런던 거리를 별 계획 없이 쏘다니다 느낌 좋아 보이는 펍이 있으면 불쑥 들어가는 식. 하루에 6개에서 7개 펍까지 돌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영국인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기도 했다. “야, 이놈이 어제 펍을 7개나 돌았단다!”
술 마실 줄 알고 호기심이 있다면 펍 크롤링은 한 번쯤 해보길 권한다. 펍은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의 준말이다. 즉 대중이 모이는 열린 장소라는 뜻이 담겨 있다. 펍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는 공간이고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가끔 펍에서 한잔하다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수도 있다. 그만큼 펍을 즐긴다는 것은 영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즐긴다는 뜻이다.
영국에는 수없이 많은 펍과 캐스크 에일이 있다. 심지어 캐스크 에일의 정보도 제공하고 내 펍 크롤링 기록도 저장할 수 있는 캐스크 파인더(Cask Finder)라는 앱도 있다. 이 앱에서 인증한 펍에 가면 QR코드가 있는데 이걸 스캔하면 방문 기록이 저장된다. 아직 내 방문 기록은 15개밖에 안 된다. 모든 펍에 인증 QR이 있지는 않아서다. 100개를 달성하면 이 잔이 다 찰 텐데, 언제쯤 달성할 수 있을까?_ 황덕창(방송 작가, 모터 스포츠 공인 심판원)







슈퍼스타 바텐더들의 화려한 칵테일 경합, 아마리 클럽
최근 세계적으로 ‘아마로(Amaro)’가 열풍이다. 아마로는 씁쓸한 맛을 지닌 이탈리아 식전주의 한 종류로, 바에서 흔히 보는 캄파리, 아페롤 같은 리큐어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매년 이탈리아에서 대표적 아마로 브랜드 4곳이 모여 전 세계 바 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들을 초대한다. 7일 동안 아마로를 탐험하도록 하는 여행 ‘아마리 클럽’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운 좋게도 올해 아시아의 유일한 멤버로 초대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세계 음식’ 중 하나인 블러드 오렌지를 이용한 천상의 캄파리 오렌지 칵테일을 마시며 시작한 여정은, 증류소 투어와 교육에 이어 절정으로 치달았다. 세계적 바텐더들을 한데 모은 칵테일 메이킹 경합이 그것. 아마리라는 술과 본고장의 문화를 바텐더로 하여금 직접 경험하게 하고, 이를 배경으로 칵테일을 만들어 그 레시피를 공유하는 것이 아마리 클럽의 진짜 숨은 목적이다. 우리는 사실 칵테일을 만들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다. 방식은 이러하다. 4명이 한 팀을 이루어 태어난 곳과 시칠리아에서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칵테일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 그리고 한국인 바텐더 4명이 한 팀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바 신의 슈퍼스타였다. 같은 곳을 보고 동일한 경험을 했는데도 각자의 문화적 배경, 재료에 대한 이해, 기물의 사용 방법 등에 따라 각각 다른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창조 현장은 충분히 흥미진진했다.
식전주란 이름처럼 음식과 함께하기에 더욱 의미 있는 법.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페어링으로 경험한 아마로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특히 장조림 같은 퍽퍽한 고기 요리에 페어링한 장조림 소스 같은 짭짤한 칵테일의 매치가 신선했다. 페어링으로 나온 칵테일은 전반적으로 텍스처가 가볍고 알코올 도수가 낮아 요리와 페어링하기 좋았다. 코스의 모든 음식은 재료 같았고, 음료는 소스 같았다. 코스의 마지막은 디저트와 함께 아마로를 모카 포트를 활용해 내린 커피의 마리아주. 이 간단한 걸 나는 그동안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심플하지만 전혀 생각지 못해 더 놀라운 매칭. 아마로를 만나러 왔지만, 이탈리아의 음식과 음료 그리고 그들의 마리아주에 푹 빠진 여행이었다. _ 김용주(바텐더, 바 앨리스 및 겟올라잇 대표)







크래프트 진을 따라가는 도시 여행, 방콕
크래프트 펍이나 양조장을 따라 여행 계획을 짜면 대개 실패할 확률이 적다. 장인들이 모이면 그 중심으로 아티스트가 모이는 법. 해서, 크래프트 펍이나 양조장 주변에 숙소의 거점을 정하면 레코드 숍부터 카페, 음식점까지 그 주변에는 즐길 거리로 가득하다. 한때 푹 빠졌던 크래프트 맥주에 흥미가 떨어질 즈음 크래프트 진을 만났다. 진은 사실 맥주보다 ‘크래프트’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술이다. 진은 하얀 캔버스에 가깝다. 주니퍼베리 향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향이 없고, 색마저 투명하다. 색다른 변주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진이 있다. 방콕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아이언볼 진(Iron Ball’s Gin). 방콕의 청담동이라 불리는 에카마이 도로 입구에 자리한 바 아이언볼 진 디스틸러리에서 직접 제조하고 판매한다. 이곳의 진은 주니퍼베리는 물론 코코넛과 파인애플에 레몬그라스까지 담겨 방콕 특유의 향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남국의 진. 방콕에 갈 때마다 이 바에서 술을 마시고 진을 사올 요량으로 통로나 에카마이 근처에 숙소를 잡는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로 된 공간은 잠수부를 모티브로 한다. 10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바와 테이블 3개가 전부. 한편에서는 디제이가 바이닐로 음악을 선곡하는데, 가볍게는 마빈게이 같은 솔, 펑크부터 각 디제이별 취향을 담은 음악에 엉덩이를 들썩이며 파인애플을 가니시로 올린 진앤토닉을 근사하게 두어 잔 마신다. 캐리어에 담을 진을 구입해 쟁여놓는다. 아이언볼 진이 떨어질 즈음이면 그건 남국으로 향하는 항공권 티켓을 살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_ 한창헌(CJ E&M 디지털 사업부 PD)







정열의 술을 향한 험한 여정, 멕시코 테킬라
테킬라 여행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건 순전히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멕시코로 여행 간 남자친구로부터 테킬라 탄생지에서 솜브레로(짚으로 만든 창이 넓은 전통 모자)를 쓰고 손에는 테킬라 잔을 든 채 멕시코 밴드에 둘러싸여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받은 순간.
멕시코 할리스코의 주도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테킬라 마을까지는 차로 고작 40분. 그러나 술 기행의 흥을 돋우려면 옛날 열차를 고쳐 만든 호세쿠엘보의 전용 열차 VIP 티켓을 사는 편이 좋다. 1시간의 여정 동안 다양한 테킬라 칵테일과 멕시코 스낵을 무제한 즐기면서(시작부터가 위험하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술 여행의 묘미다) 창밖의 화산섬 아래 아가베 밭의 푸른 전경을 만끽하는 것으로 여행은 시작된다. 마을에 도착하면 테킬라를 처음 만들던 200년 전의 시절과 만난다. 당시 테킬라 만들던 기구까지 잘 보전된 양조장에서 옛 풍미를 느끼고, 벽돌 길 건너편 테킬라 양조장에서 모든 공정을 체험한다. 뜨거운 오븐에 구운 아가베부터 증류된 테킬라를 맛보고, 대미는 테킬라 테이스팅으로 장식한다. 리델이 특별히 제작한 테킬라 잔으로 총 다섯 가지 테킬라를 맛보는데, 2개월까지 숙성한 실버로 시작해 1년까지 숙성한 레포사도, 3년까지 숙성한 아네호, 3년 이상 숙성한 엑스트라아네호, 셰리 오크통에서 최고 30년 숙성한 테킬라 등을 블렌딩한 리저바 드 파밀리아로 이어진다. 투어를 마치면 바로 향할 차례. 테킬라 마을에는 월드 베스트 바50에 포함된 바 중 전 세계에서 최고로 허름한 곳이 아닐까 싶은 바가 있다. 가장 흔한 테킬라 종류에 콜라를 넣어 칼로 휘휘 저어주는 칵테일이 이곳의 인기 메뉴. 20대부터 70대까지 동네 사람들이 모여 식탁의 땅콩을 까먹으며 같은 드링크를 마시는데, 동네 밴드가 나타나 기타를 튕기기 시작하니 모두 신나게 떼창을 한다. 기분좋게 술기운이 번진다. 현지 방식으로 테킬라를 경험하는 것도 묘미다. 실버 테킬라, 라임과 아가베 시럽, 얼음만 넣어 깨끗하고 상쾌한 맛이 나는 토미 마가리타, 과달라하라의 전통 식당에서 점심과 함께 즐기는 과일 타마린이 들어간 인기 마가리타 프로즌 타마린 마가리타, 테킬라 샷을 작은 컵에 담긴 토마토 주스와 함께 즐기는 방식까지, 여행에서 만난 테킬라 한 잔에는 그야말로 멕시코의 뜨거운 정열이 녹아 있었다. _ 배지영(건축디자인 전문 홍보대행사 ‘피오나배’ 대표)










고집스러운 소규모 양조장과의 줄다리기, 일본 니가타
사케에 관심을 갖게 된 지도 벌써 20년이다. 그간 마신 숱한 사케 중에도 편애하는 사케가 있으니, 투명한 단맛이 특징이라 ‘일본의 샤토 디켐’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라유(村裕)’다. 마실수록 애정은 더 깊어져, 급기야 양조장에까지 궁금증이 미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음주가 전부던 여행 목적에 ‘양조장 탐방’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단순 음주와 달리, 탐방을 위해서는 양조장의 허락이 필요했다. 심지어 그 문턱의 높이는 팬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그래도 외국인이니’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무작정 찾아갔다 퇴짜 맞기를 여러 차례. 결국 나는 접근 방법을 바꿨다. 마신 사케에 대한 감상과 질문을 정리해 메일로 보내기도 하고, 양조장이 주최하는 시음회에 참가하기 위해 일부러 출장 날짜를 비슷하게 잡기도 했다. 다행히 정성스러운 답장 메일을 받았다. 시음회 때마다 찍은 얼굴도장은 소소한 친분을 쌓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공들이길 1년여, 어느 날 시음회 자리가 파할 즈음 양조장 사장님이 천으로 만든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매번 멀리서 와줘서 고맙다며. 묵직한 무게로 술이 들었겠거니 짐작하고 숙소에 와서 풀어보니, 발매 전 신제품 한 병과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쪽지에는 “괜찮다면 놀러오세요”라는 짧은 문구와 양조장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 뒤로 일본 여행의 메인 테마는 양조장 탐방이 되었다. 대부분 도심지와는 멀리 떨어진 양조장의 특성상 일반적 관광객이 별로 접하지 못하는 색다른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약속도 없이 불쑥 나타난 이방인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지만, 이제는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_ 김정한(자유기고가)







피트 향을 따라, 스코틀랜드 아일러섬
지난여름 아일러섬(Isle of Islay)으로 위스키 여행을 떠났다. 평소 즐겨 마시던 아일러 위스키를 몸으로 느끼고 싶어서였다. 아일러는 인구 3500명이 거주하는 작은 섬인데, 자그마한 섬에 무려 8개의 위스키 증류소가 있다. 그러니 이곳 주민 대부분이 위스키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일러섬의 위스키 양조장은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바다에 면해 있다. 위스키를 맛보기 위해 처음 찾은 곳은 아일러섬의 중앙에 위치한 작은 마을 보모어. 이 한적한 마을을 유일하게 채색하고 있는 곳이 바로 보모어 양조장이다. 보모어(Bowmore)는 게일어로 ‘커다란 암초’라는 뜻. 실제로 양조장은 자그마한 항 옆에 요새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왜 아일러 위스키에서 바다 내음이 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일러섬 남쪽 포트엘런(Port Ellen)으로부터 해안을 따라 올라가면 아일러 위스키를 대표하는 라프로익, 라가블린, 아드벡 양조장이 차례로 나타난다. 양조장에 들러 위스키 제조 과정을 둘러볼 수도 있고 위스키도 한잔 마실 수 있다. 이곳 위스키를 처음 맛본 사람들은 “음, 이게뭐지?” 혹은 “위스키에서 독특한 향이 나는걸” 하며 의아해한다. 바로 피트(peat), 즉 이탄(泥炭) 때문이다. 이탄은 한랭지에 서식하는 식물이 오랜 세월 땅속에 충적되어 부분적으로 탄화된 것. 아일러섬은 두꺼운 피트층에 쌓여있기 때문에 예부터 피트를 강하게 태워 몰트를 만들었다. 강한 향 때문에 아일러 위스키는 호불호가 갈린다. 하지만 아일러 위스키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다. 나 같은 아일러 위스키 마니아가 상당히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양조장 구경을 끝내고 밤에 바라본 포트엘런은 더욱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하얀 색깔로 단장한 예쁜 집과 술집이 술꾼을 유혹한다. 나는 자그마한 술집을 골라 현지인과 어우러져 위스키를 마셨다. 아일러섬에서 즐긴 음식도 꽤 맛있었다. 음식에 맞춰 위스키를 골라 마실 수 있는 호사도 아일러섬의 또 다른 매력이다. _ 이기중(전남대학교 인류학과,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에디터 전희란(ran@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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