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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22

어른의 당부

2010년 이후 단색화가 급격히 주목 받기 시작했다고 해서 단색화 작가들이 살아온 수십 년의 인고와 가난의 세월이 무마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은 고집스럽게 한길을 걸어왔고, 그것은 자식과 아내, 작가 자신의 목숨을 건 세월이었다. 하종현 작가의 50년 화업도 다르지 않다.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 추상화가 하종현이 홍익대 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다. 하루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안동 하회마을로 답사를 갔다. 오래된 가옥과 담벼락 등 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학생들이 외쳤다. “와, 선생님 작품이 바로 여기에 있었네요!”
1972년, 당시 아무도 사용하지 않던 거친 마대로 제작한 캔버스 뒷면에 안료를 칠하고 뒤에서 앞으로 밀어내는 독창적 기법을 개발한 하종현 작가. 학생들의 감탄은 서양의 캔버스와 물감, 그들의 기법과 주제를 과감히 버리고, 40년 넘게 ‘서양화를 하는 한국 작가로서 정체성’을 찾아온 그에게 최고의 찬사였다.
한국의 추상미술, 그중에서도 김환기 . 박서보 . 권영우 . 정상화 . 이우환 작가들과 함께 단색화 작가로 분류되는 하종현 작가가 지난 11월 8일 상하이에 다녀왔다. 내년 3월 2일까지 중국 상하이 파워롱 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의 추상미술: 김환기와 단색화>전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 순수한 단색의 추상성으로 이루어진 단색화는 1970년 초반에 시작됐지만, 그동안 한국식 모노크롬으로 불리다 2000년 광주 비엔날레 이후 ‘Dansaekhwa(단색화)’라는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서양의 미니멀리즘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우리의 단색화는 물성, 즉 질감과 촉각이 더해져 한층 깊은 레이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4~5년 동안 뉴욕과 런던, 파리, LA 등지에서 일곱 번가량 개인전을 열고 세계 무대에 한국의 추상미술을 제대로 알린 하종현작가를 만났다. 노작가는 “지난 수년간 단색화가 많이 알려졌으니 이번 대규모 전시회를 기점으로 이제는 학술적 연구와 논문이 본격적으로 뒷받침될 때”라고 힘 있게 말했다.


이번 상하이 파워롱 미술관 전시는 선생님을 포함해 김환기 . 권영우, 정창섭 . 이우환 작가 등 한국 추상미술 거장의 작품 10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중국 본토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단색화의 의미를 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추상미술의 발전을 목도하는 기분이 어떠세요? 사실 우리나라의 추상미술이 서양미술의 중심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저로서는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어요. 회화를 크게 동양화와 서양화로 구분할 때 서양화는 시작부터 우리에게서 출발한 것이 아니니까요. 더구나 우리가 공부할 당시는 바로 서양에 가서 배워 온 것도 아니라, 우리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이 일본에 가서 서양미술을 배워 와 그걸 한국에서 다시 가르친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중간중간 건너뛰면서 변질된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기에 지금처럼 한국의 추상미술, 단색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거나 큰 발언권을 갖게 된 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에 대한 기대감도 크시죠? 지난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 열린 대규모 단색화 전시에서도 전 세계 미술관이나 갤러리 관계자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어요. 이번 파워롱 미술관 전시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생각에는 추후 한국에서 우리의 전통문화재, 예를 들면 금관이나 도자기 등과 함께 단색화를 선보이는 전시를 열어도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훌륭한 유산을 가진 민족적 감성이 단색화로 연결되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도록요.

선생님이 40년 넘게 선보인 ‘접합’ 연작은 1974년 서울 명동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처음 대중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서양 캔버스가 아닌 선생님이 직접 제작해 만든 마대 캔버스를 이용한 첫 작업이죠. 선생님도 작업 초기엔 일반 캔버스를 사용하셨는데, 그 후 어떻게 마대를 사용하게 되셨나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죠. 한창 작업하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은 전쟁 이후 사회적 환경이 아직 어수선할 때였어요. 서양화에서 사용하는 캔버스나 물감은 모두 고가의 수입품이었는데, 그런 재료를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거든요.







1 접합 08-101, Oil and Collage on Hemp Cloth, 194X260cm, 2008.
2 접합 17-301, Oil on Hemp Cloth, 291X218cm, 2017.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서양미술이라는 것이,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들과 같은 재료와 기법, 주제, 대상을 가지고는 나만의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어려웠어요. 아무리 색다르게 그려도 ‘큐비즘을 닮았다’는 식으로 서양인의 시선과 경향에 우리를 끼워 맞추는 것이 보였어요. 교수님들도 비슷했어요. 학생들이 사과를 그릴 때도 교수님과 비슷하게 그려야 학점을 잘 주셨죠. 교수도 닮아야 하고 서구 작가들도 닮아야 하고. 그럼 결국 나는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평생 나다운 것은 가져보지 못하고 남만 따라 하는 모양새가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과연 세계적 작가가 되겠어요? 그래서 그걸 다 버린 겁니다.

그래서 서양식 캔버스도 버리고 형식도 바꾸신 거군요? 삼성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고 한 것처럼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때 내 것이 나온다고 봐요. 그래서 마대를 구해 캔버스를 만든 뒤 그 뒷면에 물감을 칠하고 밀어내는 작업을 했어요. 마대 앞면으로 물감이 올라오면 거기에 그림을 그렸죠. 그게 ‘접합’ 시리즈입니다.

서양식 캔버스는 고가라 구하기 어려웠겠지만, 당시 마대 또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는데 어디서 구하셨나요? 전쟁 이후 해외에서 원조 물자가 막 들어올 때였어요. 밀가루 같은 것들이 마대에 담겨 있었는데, 인부들이 원조 물자를 창고에 내려놓고 마대를 탈탈 털어 그걸 남대문에 갖다 팔아 용돈을 마련하더라고요. 그걸 구해서 썼어요.

나만의 독창성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로 새로운 기법을 창안하셨는데, 당시 미술계 안팎의 반응은 어땠나요? 세계적으로 그런 바람이 많이 불던 시기였어요. 한국도 마찬가지였고요. 예를 들면 이번에 파워롱 미술관에서 함께 전시하는 작가만 봐도 그래요. 단색화라고는 하지만, 각자 모두 달라요. 해외 큐레이터들도 놀라는 부분이에요. 한국이라는 좁은 나라에서 같은 시대를 살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텐데, 한데 모아보니 모두 다르다는 거예요. 어떤 공통된 사조나 이념으로 하나 되어 작업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비슷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아니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도 한국에서 작업하라고 권하신다고요? 대학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제자 중에도 유학을 다녀온 학생이 많습니다. 잘 다녀왔다고 인사하러 오면 “그동안 공부한 화집을 좀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걸 보면 서양적이지도 동양적 이지도 않은 어정쩡한 그림이 많아요. 오히려 자기를 잃어버리는 거죠. 그래서 학생들에게 가급적 한국에서 생각하고, 한국에서 재료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일산에 있는 하종현 작가의 스튜디오. 작업에 사용하는 안료가 한쪽에 가득하다.

1974~1980년에 작업하신 초기 ‘접합’ 작품이 마대를 뚫고 나온 물감의 자연적 표정 그대로를 주목했다면, 1980년대 이후 ‘접합’ 작품은 선생님의 움직임이 많은 부분 개입된 것입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이후접합’시리즈라고 해서 그동안의 ‘접합’과 달리 채색 강한 작품도 하셨고요.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는 선생님의 모습이 후배 작가들에게 자극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옛것을 되풀이한다기보다 새로운 것에 흥미가 많아 새것을 구상하고 발전시키는 편입니다. 해보다 안 되면 그다음으로 가면 돼요. 약속되지 않은 미래의 길을 걷는 거죠. 열심히 한 곳을 바라보고 한 우물을 파다 보면 어딘가에 반드시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님들이 하는 구도와 내가 하는 구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인내해도 50년 가까이 한길을 걷는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인생을 돌아볼 때, 작가로서 위기를 느낀 적은 없나요? 많았죠. 대부분의 문제는 가난에서 옵니다. 나만 해도 대학교수지만 실제로는 아주 박봉이었어요. 가족들을 부양하면서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하고, 전시회도 열어야 하고. 굉장히 힘든 길이에요. 연탄 때는 좁은 집에 살 때 아이들이 연탄가스를 마셔서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가난하게 살았어요.

교직에 계셔서 여느 작가들과 달리 나름 안정된 길을 걸어오셨다고 생각했는데 아니군요. 작가의 그런 숙명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내셨나요? 조치훈 9단이 여섯 살 때 삼촌 소개로 일본의 바둑 기사 기타니 미노루 9단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어요. 매일 기원 마루나 닦고 친구들에게 조센징이라고 놀림받았는데, 프로 입단 후 자신의 기록을 끊임없이 갈아치우며 일본 바둑계를 제패했죠. 그때 한국 기자가 물었어요.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바둑을 두느냐”고. 조치훈 9단은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고 말했어요. 나도 그래요. 지금껏 아이들과 아내, 그리고 내 목숨을 걸고 작업했어요. 한국의 젊은 작가들도 남 눈치 보는 대신 꿋꿋하게 자기 갈 길 가면 좋겠어요. 요즘 작가들은 조금 노력하고는 쉽게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데, 그러지 말고 평생을 두고 그려야 해요. 목숨을 걸고 하라는 거죠.


“단색화는 전 세계 미술인과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문헌이 부족해요. 단색화에 대한 연구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문이 더욱 많아져야 합니다.”

2010년에 다양하고 화려한 컬러를 사용한 ‘이후접합’ 시리즈를 선보이셨습니다. 화려하고 경쾌한 컬러감이 인상적인데, 지금 선보이는 ‘접합’ 신작에 오렌지색 같은 컬러가 들어간 것도 두 시리즈가 서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세계 유수의 미술관 큐레이터들이 가끔 작업실을 찾아와요. 그들에게 ‘접합’과 ‘이후접합’을 보여주면 어떤 연관성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 ‘접합’ 시리즈지만, ‘이후접합’ 시리즈도 꼭 계속하라고 조언을 합니다. 그런 과정이 작업에 큰 도움이 되죠.

단색화가 여전히 인기 있는 이때, 미술계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언론과 잡지, 그리고 미술관과 갤러리의 노력으로 단색화는 전 세계 미술인과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문헌이 부족해요. 단색화에 대한 연구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문이 많지 않죠. 그러한 아카이브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곧 연말입니다. 선생님께 2018년은 어떤 해였을까요? 올 한 해는 내가 죽었다 살아난 해라고 볼 수 있어요. 지금 보이는 대형 작품이 150호인데, 이번 여름 그 지독한 더위에 300호짜리 작품을 했어요. 상하이 파워롱 미술관에 걸린 작품입니다. 작업이 너무 고됐고 그 때문에 지금 몸이 안 좋아졌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래서 역시 일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부지런히 일했으니 다음이 있는 거니까요. 오늘의 수고 없이는 내일의 희망이, 내일의 노력 없이는 모레의 기쁨이 오지 않습니다. 고된 과정을 쉽게 뛰어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종류의 영광도 찾아오지 않는 것처럼요.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안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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