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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18 FEATURES

그 XX, 양익준

  • 2018-10-29

경계를 넘나드는 발칙한 남자, 양익준의 지난 10년과 다음 10년에 대해.

화이트 셔츠와 블레이저 Scabal, 블랙 에나멜 카보숑과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빵 드 쉬크르 링 Fred, 타이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2009년 한국 영화엔 괴랄한 작품이 등장한다. 수십억이 예사로 투자되는 공룡의 틈바구니에서 순제작비 2억5000만 원으로 완성한 작은 영화가 파장을 일으켰다. 투박하지만 정직하고 적나라하지만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똥파리>는 사회에서 터부시하는 것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어두운 뒷골목과 모서리에 핀 곰팡이를 좇고 우리가 외면하던 것들을 말한다. 거기엔 가족과 계급, 젠더와 폭력 같은 불편한 것이 담긴다. <똥파리>는 아수라였다. 130분의 러닝타임 내내 욕설이 BPM처럼 반복되고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나열한다.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고 치유와 화해는 와해된다. 그 지옥 같은 연대기의 설계자는 양익준이다.
<똥파리> 이전에 양익준은 배우로 살았다. 주체할 수 없는 끼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연기만으론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막연한 답답함에 숨이 막혔고 여전히 발목을 잡는 끈적한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썼다. 첫 신을 적은 뒤 2년 만에 상훈이 세상에 나왔다. 부모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오직 폭력으로만 세상을 대하는 용역 깡패 ‘똥파리’가 탄생했다. 양익준의 데뷔작은 개봉 전부터 평단에 파장을 일으켰다. 프랑스와 남미 그리고 아시아 지역의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그를 초청했다. 소문만 무성하던 실체를 2009년 4월 어느 밤 충무로에서 관람했다. 개봉관을 찾기도 어려웠고 객석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똥파리>는 상영 내내 몸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싶은 여러 순간이 찾아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이후엔 어떤 허탈감과 공허, 꺼림칙한 슬픔이 찾아왔다. 어느 평론가의 평처럼 ‘괴물 같은 작품’이었고 끔찍한 서사였으며 난처한 현실을 필터 없이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런 작품을 완성하고 양익준은 감독이 됐다. 단 한 편의 장편영화로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감독이 됐다. 이후 그의 삶은 변했다. 과장을 약간 보태 ‘2000번 정도 인터뷰를 했고’ 영화제를 찾아 1년의 반을 해외에서 보냈다. 몇백 편의 시나리오를 받았고 제작사가 돈을 싸 들고 찾아왔다. 근근이 상업 영화에 얼굴을 비치던 단역 배우가 그 신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이 됐다. 양익준은 당황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로, 해갈의 통로로 시작한 작업이 이토록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샴페인을 터뜨려야 할 시기에 어둡고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았다. 형체 없는 불안에 숨이 가빠졌다. 이후 양익준은 다시 배우로 살았다. 신기하게도 촬영 현장에서는 그런 증상이 멎었다. 캐릭터의 삶을 연기할 때 비로소 몸은 편해졌다. 독립 영화는 물론 크고 작은 상업 영화에서 주연을 맡고 주말 드라마까지 진출해 친숙한 배우가 됐다.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그와 닮았다. 세상에 서툴고 약지 못한 사회 부적응자. 그러나 연민이 느껴지는 캐릭터가 그의 연기에 담겼다. 그러나 차기 작품은 항상 그의 고민이었다.
올해로 <똥파리>가 개봉한 지 10년이 됐다. 양익준은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준비를 마쳤다. 이전과 같은 작품이 될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지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에 선보일 인물들 역시 우리와 닮았지만 낯설게 그려질 것이다. 그리고 생전 보지 못한 에너지로 채워질 것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양익준의 머릿속은 영화로 꽉 차 있다.

<똥파리>가 개봉한 지 벌써 10년이 됐다. 여러모로 삶에 변화가 많았다. 이상하다. 나는 아직도 그때와 달라진 게 없는데…. 아니다. 조금 변했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똥파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양익준이 가장 나다웠던 것 같다. 10대부터 연기를 해서 그때(30대 초반) 한계를 느꼈다. 연기로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나 트라우마를 떨치고 싶었다. 이 나이를 먹어서까지 그런 것에 시달리는 게 싫었다. 나름의 회자정리였던 셈이지. 어쨌든 생각해보니 많이 변한 것 같다.(웃음)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예로 들면 달이 하나 존재하던 세계에서 둘인 곳으로 이전한 느낌이랄까. 감독님이란 호칭으로 10년째 불리고 있고, 영화제 심사위원이 되는 이상한 경험도 했고, 물론 경제적으로도 많이 윤택해졌다.

양익준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지 않는 영화제가 없더라. 독립 영화계에선 슈퍼스타인 것 같다.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어려운 일을 맡게 됐다. 몇 년 전부터 요청을 받았다. 계속 거절하기도 미안하고, 신진 감독들의 작품을 보는 게 나름 자극이 된다. 실력 좋고 인성까지 좋은 친구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 우리 때와는 화두 자체가 다르다. 근래엔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여성에 대한 영화가 많다. 전에 비해 장비도 좋아지고 기술도 늘어 배우는 게 많다.

<똥파리> 이후 인터뷰를 많이 했다. 그중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게 “저는 제 영화가 되게 좋거든요”라고 말한 부분이다. 물론 모든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애정을 느끼겠지만 그렇게 천진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내 새끼니까 당연히 애정이 간다. 살면서 가장 답답하고 서른이 넘어서까지 발목을 잡던 문제를 해갈했다는 해방감도 있었고. 난 가족이라는 테마가 지긋지긋했거든. 거기서 오는 심적 부담,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똥파리>를 완성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뜻밖에 소통이 생겼다. 영화 개봉 이후 여러 차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거기서 만난 관객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줬다. 그래서 영화가 더 사랑스러워졌다.

논란도 많았다. 필요 이상으로 욕설이 많다는 지적도 있었고. 아마 처음부터 상업 영화 형태로 시작했으면 지금과는 달랐겠지. 수위 조절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았으면 진행하기 어려웠을 거다. 그런데 아마 제목은 고집했을 거다. 첫 신을 쓰기 전부터 ‘똥파리’라는 제목은 정해져 있었다. 10년 동안 생각을 해봤는데 대체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욕에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도 많았다. 그런데 상훈이란 아이는 그런 언어를 구사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고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다. 아마 자연스러운 언어였을 것이다.

해갈이라고 했다. 해소가 됐나? 그렇다. 우스갯소리로 <똥파리>는 내게 ‘살풀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귀신 들린 집에서 굿하는 것처럼 무당 부르고 한바탕 굿을 한 거다. 이후에 내게서 무언가가 떨어져나갔다.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아주 홀가분하고 편안해졌다.

상훈을 꼭 죽여야 했나? 화해의 길목에서 추락사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그냥 내 속에 있는 울분과 증오로 가득 찬 그 아이를 상훈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수컷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분노 같은 것. 이제는 제발 그런 것과 결별하고 싶었다. 내 딴에는 그런 감정, 시간, 기억과 쿨하게 헤어진 거다. <똥파리>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다. 가끔은 ‘폭력의 연대기’같이 내가 놀랄 정도로 과분한 평이 있더라. 이미 내 손을 떠난 영화다. 그걸 본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 흥미로울 뿐이다.






블랙 셔츠, 턱시도, 보타이 모두 Bottega Veneta,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빵 드 쉬크르 링 Fred.

부침이 많은 작업이었다. 스태프로 참여한 후배에게 감독의 전세 자금까지 빼서 제작비를 충당했다고 들었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지금은 사라진 충무로영상센터에서 시나리오를 썼다. 2년 정도 걸렸고 쓰면서도 속이 많이 상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5000만 원 지원을 받고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작업을 시작했다. 무료 봉사로 도와준 스태프도 많다. 연희의 집이 내가 살던 반지하 전세였다. 그 신을 찍고 바로 전세금을 뺐다.(웃음) 제작비 문제로 스태프 전체를 해산한 적도 있다. 이후 20만 원이 생기면 한 회 차를 찍고 그런 식으로 완성했다.

지금은 사정이 좀 나아졌나? 영화를 완성하고 한동안 떠돌았다. <워낭소리>를 만든 이충렬 감독 집이 몇 달 빈다고 해서 거기 들어가 살기도 했고. 몇 달 뒤 <똥파리> 수익금이 입금돼서 반지하 전세에서 지상 전세로 옮겼다. 지금도 여전히 내 집은 없지만 공기 좋고 경치 훌륭한 성북동에 산다.

공황장애가 심했다고 들었다. 개봉 이후 2년 동안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유럽과 남미, 아시아 여러 나라 영화제에 참석했다.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는데.(웃음) 인터뷰와 행사, 관객과의 대화… 그런 게 너무 한꺼번에 다가왔다. 그냥 변두리에서 연기하던 양익준에게 너무 큰 변화가 생긴 거지. 어느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지도 못했고. 지금도 가급적 영화 시사회나 뒤풀이엔 안 간다. 앉아 있으면 혼란스럽고 힘들다. 영화제 참석도 되도록 피한다. 아,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엔 참석한다.

10년 동안 여러 활동을 했다. 나름 중견인데 아직까지 학도 같은 느낌이 있다. 대중이 그런 면을 좋아하는 것 같다. 지극히 평범한 탓일 거다. 전공자가 아니라 그런 것도 있고.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해 기술적 측면이 약하다. 최근엔 단편영화에도 CG 같은 걸 많이 사용한다. 내가 모르는 기술이니까 신기하다. 그런 부분에 취약한 대신 감정적인 부분을 신경 쓴다. 그게 장점으로 부각되는 것 같다.

JTBC 프로그램 <전체관람가>에서 선보인 <라라라>의 등장인물인 감독의 대사에 이런 부분이 있다. “나는 기술은 잘 모르니까.” 이거 본인의 이야기인가? 그렇다. 내가 스태프에게 주문하는 건 기술적 측면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신의 느낌과 무드, 연기의 감정선 같은 것이다.

<라라라>에는 여러 고민이 나온다. “100% 배역에 동화될 수 없다는 한계를 직시하고 연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착취해서 영화를 찍는 것이 옳을까” 같은 것. 이런 것 모두 양익준이 실제로 하는 고민이지 싶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똥파리>도 본인의 이야기가 투영된 작품이고. 심지어 단편영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의 주인공은 이름이 익준이다. 기본적으로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맞을 거다. 똑같을 순 없더라도 난 결국 내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라라라>에 나온 고민은 현재의 고민은 아니다. 이미 끝난 고민이다. <라라라>를 함께 작업한 배우들과 술자리를 많이 했다.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그들의 고민도 들었다. 그래야 내가 캐릭터를 만들 수 있으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의 고민 중 상당수가 예전에 내가 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넣었다. 다른 작품도 당시 내 고민이 투영된 것이 많다. <바라만 본다>에선 사랑에 대한 답답함을 말했는데, 내가 그때 딱 그랬거든. 30세가 넘어서 처음 연애를 해봤다. 그전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럼 현재 양익준의 고민은 무엇인가? 잘 사는 것. 관념적이긴 한데 그렇게 거창한 걸 바라는 건 아니고 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소소한 기쁨에 둘러싸여 살고 싶다. 이제는 함정도 많이 겪어봤기 때문에 크게 무서운 게 없다. 규칙적으로 살고 싶기도 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원한다. 전처럼 맨땅에 머리를 부딪쳐가며 영화를 찍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제는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최근에 많이 느끼는 건데 영화는 절대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물론 여러 스태프가 있었지만 <똥파리>는 양익준의 원맨쇼에 가까웠다. 그렇지 않다. 그때 함께한 스태프들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영화다. 당시 스태프들을 아직까지 만난다. 스물한 살이던 프로듀서는 현재 규모가 큰 영화를 진행하는 30대 PD가 됐고, 촬영감독과는 아직까지 함께 작업하고 있다. 만나면 신기하고 포근하다. 이 친구들이 앞으로도 내 동료일 거다. 잘나지도 않았고 두들겨 맞으며 살고 있지만 살다 보면 각자 지혜가 생겨서 이를 나누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만화 <원피스> 같은 거다. 처음엔 원피스란 보물을 찾기 위해 떠나지만 결국엔 동료들과 함께하는 과정이 즐거운 거거든.

결국 차기 작품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똥파리> 이후 여러 단편을 만들었지만 장편은 10년째 소식이 없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만 정말 에너지가 없었다. 워낙 많은 걸 쏟아내고 이후로도 겪은 게 많은 작품이었다. 지금은 찍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가능하면 내년에 촬영을 시작하고 싶다. 몇 가지 아이템이 있다. 아주 작은 규모와 제작비가 꽤 필요한 작품. 여자 2명이 출연하는 낯선 형태의 가족 이야기가 작은 규모의 영화다. 규모가 큰 영화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닌 낯선 세상에 대한 어두운 이야기다. 일종의 판타지랄까.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했다. 형식은 이야기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 형식 자체가 이야기가 될 수는 없지. 어떤 형태든 거기에 리얼한 걸 담으면 된다. 요괴들을 모아놓고 영화를 찍어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거다. 난 리얼리스트가 맞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영화에 미친 사람 같다. 감독은 물론 연기, 목소리 연기, 각본, 편집, 타이틀 디자인까지 빼곡하다. 다른 일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영화를 좋아한다. 여러 작품, 사건을 겪으면서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흥할지 망할지 모르지만 평생 영화를 할 것 같다. 그래서 일상이 중요하다. 어쩔 수 없이 영역이 흐려질 수는 있겠지만 개인적 일상과 영화적 일상이 잘 양립했으면 좋겠다. 우디 앨런처럼. 타이틀 디자인은 <박화영>에서 했는데, 감독이 <똥파리>에서 나(상훈)를 죽인 이환이다.(웃음) 우리는 이렇게 각자 위치에서 뭐든 하고 있다.






셔츠, 네이비 스트라이프 슈트, 버건디 니트 타이 모두 Scabal, 브라운 레이스업 슈즈 S.T. Dupont, 워치 Frederique Constant, 양 손가락에 낀 비제로원 링 모두 Bvlgari, 행커치프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자연인 양익준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며 사나? 밥을 지어 먹고 담배를 피우고 음악을 듣는다. 가끔 야한 것도 보고 친구들과 낮술을 마신다. 2011년부터는 매년 해외에 석 달 정도 체류하고 있다. 거기서도 마찬가지다. 특별할 것이 없다. 요샌 노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연기하고 일상을 사는 것 말고 밭을 일구는 것 같은 생산적 노동을 하고 싶다. 전원생활을 고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텃밭에 상추나 토마토, 고추, 깻잎 같은 걸 키워보고 싶다.

아마 양익준은 평생 혼자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능에 출연한 모습을 보니 결혼에 관심이 많더라. 아마 하지 않을까? 오랫동안 생각 없이 살다 보니 상상이 안 되지만 쉰 전에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직 2세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아이를 키울 거면 너무 늦어지면 안 될 것 같다. 예전에 관객과의 대화에서 같은 질문을 받고 “제 DNA를 후세에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웃음)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지낸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예능 출연은 의외였다. 망설였다. 거부감 같은 건 없었는데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불타는 청춘>은 프로그램 포맷도 맞지 않아 몇 차례 고사했다. 작가들이 계속 요청해서 참여하게 됐다. 그런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촬영장도 너무 편하고 좋은 친구들도 만났다. 50~60대 팬도 얻었다.

양익준은 잘 팔리는 배우다. 감독들이 즐겨 찾는다. 요샌 좀 뜸하다.(웃음) 아무래도 회사를 나와 혼자 활동하다 보니 홍보도 안 되고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기 어렵다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사람들도 잘 만나지 않다 보니 프로듀서나 감독과 친분도 없다. 업계에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다. 연기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거기서 얻는 에너지도 있고 무엇보다 생활을 가능케 해준다. 시나리오 작업으로 스케줄 조정이 필요하겠지만 별일 없다면 하반기에 일본 영화 두 편에 출연할 예정이다.

좋아하는 배우는 누구인가? 문성근 선배. 오래전부터 고백하듯 말했다. 선배도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안다.(웃음) <꽃잎>을 보고 정말 미친 사람 같다고 느꼈다. 저렇게 멀쩡한 사람이 어떻게 저런 눈빛을 할까 싶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선배와 멋진 작품을 하나 하고 싶다.

양익준의 연기는 자연스럽다. 정극이라기보단 옆집에 사는 삼촌이나 동네를 걷다 마주치는 형 같은 느낌이다. 무엇보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실패한 예술가’ 연기론 국내 제일이다. 자연스러운 게 좋다. 경직되면 관객이 느끼고 불편해한다. 질문처럼 옆방 삼촌 같은 역할을 맡는다면 정말 잘해낼 자신이 있다. 실패한 예술가는 주위에 견본이 많다.(웃음) 같은 연기라도 내가 하면 불쌍해 보이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귀엽고 측은하게 봐주는 게 고맙다.

연기는 말랑말랑하고 자연스러운데 연출은 정반대다. 진하다. 감정이란 게 원래 깊은 골에 고인 물 같은 거다. 눈빛 한 번, 말 한마디에 녹지 않는다. 세게 부딪쳐야 해소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꼭 진한 것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특정 장르를 고집하고 싶진 않다. 판타지도 좋고 멜로도 좋다. 단편도 좋고 장편도 좋다. 긴 호흡의 드라마도 해보고 싶다. 최근엔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연출 제안을 받았다. 그런 프로젝트도 재미있을 것 같고. 어떤 것이 됐든 이제는 여문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

양익준의 영화엔 유독 당돌한 여성이 자주 나온다. 여자가 어려웠다. 감정 표현은 물론 말도 잘 못할 정도였으니까. 20대 후반에 만난 이성 친구가 그걸 풀어줬다. 만날 때마다 꽉 안아주고 여러 이야기를 해줬다. 그런 성숙한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제는 누군가와 사랑하는 게 편하다.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존중이 있다. 난 그들이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똥파리>에서도 엄마라는 존재는 가족을 존재하게 하는 구심점이다. 연희도 사실상 한 가정의 엄마고. 가정이 와해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여성이라는 존재다. 그들이 당당해야 하는 이유가 내겐 확고하니까 그렇게 표현되는 것 같다.

40대가 됐다.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몸이 고장 난다.(웃음) 회복도 더디고 잠도 푹 자야 한다. 물론 식사도 중요하다. 생활적 측면에선 안정되니까 불안정한 동기가 없다. 나이를 먹다 보니 사람이 더 예민해지는 것 같은데 그걸 둥글게 깎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차기작에 대한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 하반기에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싶다. 게으름이 문제인데, 누군가 날 가두고 채찍질을 해줬으면 한다.(웃음) 내년 초에 완성한 시나리오로 배우를 섭외하고 늦어도 가을엔 촬영에 들어가고 싶다. 머릿속으로 캐릭터를 맡아줬으면 하는 배우 구상도 마쳤다. 노년의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가 나오는 영화가 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채찍질이 필요하다.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사진 김성용   헤어 기안   메이크업 이시연   스타일링 이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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