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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18 FEATURES

20세기적 서울

  • 2018-10-26

서울은 급격히 자랐다. 성장판에 생채기가 날 만큼 키를 키우고 매무새를 고쳤다. 서울은 손에 꼽히는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이지만 여전히 곳곳에 20세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손때가 타고 역사가 묻은 발자취를 덤덤히 좇았다.

해방촌 Since 1945 .
해방 직후 북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은 용산2동과 후암동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이북 사람들과 근처 용산 미군 기지에 기대 연명하던 사람들이 모여 산 달동네는 ‘해방촌’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지금은 이태원과 경리단, 해방촌으로 이어지는 서울에서 가장 뜨거운 코스지만 이곳은 가난하고 기댈 곳 없는, 세상이 두려운 사람들의 피난처이자 보금자리였다. 틈 없이 들어선 낮은 지붕 집은 하나같이 소박하고 낡았지만 젊은 사람들이 곳곳을 채운다. 저녁이면 언덕 끝 완만하게 이어진 남산 자락과 곳곳의 루프톱 바에 인파가 모인다. 한강의 남쪽으로 사라지는 섬세하고 차분한 노을을 바라보기 위해서다. 이곳은 매일 이런 이불을 덮고 곤히 잠든다.





종로 세운상가 Since 1968 .
세운상가군의 시작은 서울의 중심 종로다. 세운상가는 대한민국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였고 백색 가전 시대를 알리는 서막을 장식한 장소였다. 당시 서울특별시 시장 김현옥은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으로 세운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지금은 리모델링을 거쳐 크고 작은 전자 부품 가게와 음향 기기 매장으로 탈바꿈했다. 일반인에게 개방된 옥상에 올라 상가 주변을 둘러보면 서울의 민낯을 만날 수 있다. 광화문과 을지로, 종로3가를 기점으로 종묘까지, 이곳의 시간은 어떤 경계를 타고 다르게 흐른다. 높게 솟은 마천루 숲과 판자 지붕 군락은 다른 시공이며 앞만 보고 질주한 서울의 부르튼 살이다. 슬레이트 지붕의 골목 사이사이에선 여전히 20세기 상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서소문아파트 Since 1972 .
1972년 서울의 아파트 비율은 주거 시장의 2%에 불과했다. 서대문로로 흐르던 하천을 메우고 물길을 따라 지은 곳이 서소문아파트다. 하천 복개 지역에 건설해 비스듬히 꺾이는 형태를 띠었다. 완공 직후엔 프리미엄 주거지로 각광을 받았다. 1층에 다양한 상가를 들여 편하기도 했거니와 중앙난방 시설과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첨단 아파트였다. 당대에 내로라하는 재산가와 연예인이 이곳에 머물렀다. 현재는 하천부지에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법이 바뀌어 재건축을 하지 못한다. 곧 역사의 뒷골목으로 사라질 건물이다. 각 동이 옹기종기 붙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지만 7동과 8동 사이엔 반대편으로 연결된 통로가 있다. 건축가 황두진은 <가장 도시적인 삶>에서 이 통로를 가리켜 “서소문아파트가 도시를 대하는 섬세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라 했다. 담장을 둘러 주변 지역과의 차단을 꾀하는 요즘 세상에선 보기 힘든 미덕이며 ‘도시적 예의범절’이라고 한다. 그 시대엔 7동과 8동을 지나는 그런 멋과 배려가 있었다.





진양상가 Since 1968 .
종로에서 충무로까지 1km에 달하는 거리엔 ‘세운상가군’이 있었다. 1966년 착공, 이듬해에 현대상가(2008년 철거) 준공을 시작으로 아세아상가, 대림, 청계, 삼풍, 신성 등이 차례로 들어서고 진양이 그 끝을 장식했다. 진양은 특별했다. 서울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었고 그런 바람이 담겼다. 그래서 전에 없던 규모의 공사를 진행했다. 1인당 국민총소득이 114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6만3000평에 달하는 대규모 상가와 17층 고층 아파트로 완공했다. 건축가 김수근은 세운상가군의 건물 3층 보행 덱을 모두 연결해 아래로는 차가, 3층으로는 사람이 지나다니도록 했다. 그 끝 지점이 진양이었다. 1970년 후반, 서울의 중심이 명동으로 옮아갈 때까지 진양은 서울의 랜드마크였다. 당시 힙한 사람들이 몰리던 볼링장과 한국 최초의 대형 마트인 200평 규모의 ‘슈퍼마키트(슈퍼마켓)’가 이곳에 있었다.





숭인상가아파트 Since 1979 .
아파트 맹신 도시의 불과 40년 전 모습은 평야였다. 멀리까지 내다보였고 이제 겨우 야트막한 3층 연립주택이 들어서고 있었다. 동대문 인근은 상가를 제외하곤 낮은 슬레이트 지붕 천지였다. 제4공화국 출범을 코앞에 두고 종로구 숭인동에 숭인상가아파트가 들어선다. 앞으론 청계천이 흐르고 창을 열면 남산타워가 보이는 나름 천혜의 거주지였다. 당시 동대문에서 삶을 꾸려가던 무수한 상인은 숭인상가아파트에 입주하는 것이 꿈이었다. 1층엔 주로 가죽 제품을 파는 상가가 입주했고, 2・3층엔 상가의 창고나 작은 점방이 있었다. 4층부터 8층까진 20평 남짓한 109세대가 빽빽이 모여 삶을 꾸려나갔다.





동작대교 Since 1984 .
서울의 역사는 한강 다리에서 시작됐다. 전국에서 모여든 이방인들은 달콤한 꿈을 꾸며 수억만 번 다리를 건넜다. 강의 남과 북을 잇는 연결의 시작은 제1한강교지만 서울이 인구 수천만이 밀집한 메트로폴리탄으로 변한 역사는 동작대교부터다. 서울의 배꼽인 용산구와 동작구를 잇는 11번째 한강 다리는 교통 체증으로 탄생했다. 한강대교와 반포대교를 오가는 차로 다리는 항상 성냥갑 같았다. 이를 분산하기 위해 서둘러 동작대교를 건설했다. 현재 지옥 같은 교통 체증의 시작인 셈이다. 한강 다리 중 가장 폭이 넓고(40m) 곧다. 다리 밑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작게나마 미래가 보인다. 이방인들은 저 희미한 빛을 보고 지금의 서울을 이뤘다.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사진 최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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