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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18 FEATURE

당신의 성공 열쇠는 무엇입니까?

  • 2018-08-24

많은 사람이 원하는 성공. 그 비결을 알고자 성공 스토리를 담은 여러 책을 살폈지만 와 닿지 않는 이야기만 가득하다. <노블레스>가 창간 28주년을 맞이해 성공의 열쇠를 직접 찾아 나섰다. 2018년, 이 시대의 관점으로 성공을 재정의하고 뷰티, 예술,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정받은 8인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성공의 정의와 그 비법을 물었다.

겸손한 도전정신 제네시스 스타일링 담당 상무 이상엽
자동차 디자인을 시작한 계기가 조금 특별하다고 들었다. 보통 자동차 디자이너라면 어릴 적부터 차를 좋아했거나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다니며 배운 추억이 있지 않나. 하지만 난 정반대다. 자동차 디자인이 있는 줄도 몰랐고, 대학에선 순수 미술을 전공했다. 배낭여행을 떠나 우연찮게 미국 아트 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을 방문했는데 자동차 모형을 만들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고 이 일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졸업 후 GM과 폭스바겐, 벤틀리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에서 일했다. 지금은 한국인 자동차 디자이너가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흔치 않은 케이스였다. 그땐 한국 자동차의 위상이 높지 않아 말 못할 설움이 많았다.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있어 어울리기 쉽지 않았고, 못생긴 차를 보면 한국 차 같다고 놀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했다. 디자인 단계에서 경쟁 회사 차를 연구할 때마다 현대자동차 모델이 등장하면서 한국인 디자이너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마음속 깊이 자부심을 느꼈다.
쉐보레 카마로 5세대와 콜벳, 벤틀리 플라잉스퍼 등 각 브랜드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를 담당하며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자신만의 무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재능은 학업과 노력에 의해 발전할 수 있다. 다만 선택의 기로에서 늘 쉬운 일보다 어려운 것을 골랐다. 인정받고 자리를 잡을 때쯤 미국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영국으로 옮겨간 이유도 전혀 다른 디자인 세계에 대한 도전정신과 호기심이 컸기 때문이다.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성향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위에 언급한 차 중에서 특히 애착이 가는 모델이 있나? 내게 그 차들은 다 키워 출타시킨 자식 같은 존재다. 과거의 결과물에 연연하면 다음 스텝으로 옮겨가지 못한다. 지금 제네시스 스튜디오에서 진행하고 있는, 앞으로 출시될 신차에 온 정성을 쏟고 있다.
제네시스에 와서 새롭게 경험한 도전이 있다면? GM이나 폭스바겐에선 아이코닉한 차를 많이 디자인했고, 벤틀리에 있을 땐 헤리티지에 부합하는 럭셔리 디자인을 추구했다. 그런데 제네시스는 완전히 다르다. 한국을 대표하는 프리미엄 브랜드를 목표로 차를 디자인하는 것도 매력적이나, 내가 한 디자인을 통해 브랜드 히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셈이다. 이런 귀한 경험을 할수 있는 자동차 디자이너가 몇이나 될까.
모든 프로젝트가 성공으로 연결되진 않았을 것 같다. 나는 매일 실수하고 매 작업마다 실패를 경험한다. 그렇다고 좌절하진 않는다. 디자인은 정답이 없고 실험하는 일이지 않나.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이루고 싶은 최종 목표는? 지난 25년간 8개 나라에 살았고 15개의 브랜드에서 일했다. 그동안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개인적 커리어를 쌓았다면 앞으로는 디자인팀 리더로서 일하는 데 에너지를 쏟을 것이다. 멋진 디자인뿐 아니라 제네시스를 소유하고 싶게 하는 스토리텔링 작업에도 집중할 예정이다.






성공의 교과서 엘앤피코스메틱 회장 권오섭
올해 엘앤피코스메틱 설립 9주년이다. 매출 4000억 원 돌파라는 기록 때문인지 역사가 이보다 긴 줄 알았다. 다들 단기간에 이룬 전무후무한 성장이라고 한다. 다소 교과서적인 대답이지만 화장품에 대한 나의 소신은 ‘내용물이 최우선’이다. 이를 위해 직접 시장조사를 하고 마스크 팩 판매 회사가 아닌 ‘개발’ 회사라는 마음가짐으로 연구·개발에 힘쓰고 있다. 좋은 제품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한다.
평소에도 사원증을 걸고 일하나? 사원증을 걸고 있는 오너의 모습이 생경하다. 모든 직원과 평등한 위치에 있으려 한다. 직원들도 사원증을 걸고 일하지 않나.(웃음) 가령 패키지 디자인도 내 취향이 아니라 전 직원의 투표로 결정한다. 물론 회장인 나도 한 표만 행사할 수 있다. 회사의 성공은 직원이 행복해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차별 없는 근무 환경에서 나온다.
한국 여행 기념품이 ‘마스크 팩’이라 할 만큼 인기가 대단하다. 마스크 팩의 고급화를 처음 시도한 인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마스크 팩의 가능성을 어디서 보았나? 예전에 다른 화장품 브랜드를 운영할 때 2000원대 마스크 팩을 출시했다. 마스크 팩 5장을 1000원에 팔던 당시 시세를 감안하면 비싼 가격임에도 한 달에 20만 장씩 꾸준히 나갔다. 그때 가능성을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마스크 팩 고급화 전략을 세웠다.
지금의 엘앤피코스메틱이 있기 전 실패는 없었나? 있었다. 마스크 팩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2011년에 사업파트너의 상장이슈로 갑작스럽게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순간 고전했지만 정면 돌파 자세로 제품 연구에 더 집중했다. 묵묵히 노력하니 소비자들이 먼저 알아보더라.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다.
주변 사람의 도움이라면? 다른 이에게 피해를 많이 주면 재기하기 어렵다. 사업 실패로 인한 손해는 되도록 내가 책임졌기 때문에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설 때 주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도움을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정직하게 하고 사회 환원에도 앞장서는 ‘잘’ 사는 삶이 진정한 성공이다.
잘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한다. 꾸준한 노력과 준비는 당연하고, 사람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모두가 함께하는 ‘투게더(together) 정신’을 새겨야 잘 살 수 있다.





세계로 뻗는 야망 CF 감독 손정
중국과 홍콩에서 유명 CF 감독 반열에 올랐다. 외국인으로서 쉽지 않았을 텐데, 광고주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았나? 중국은 대륙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이자 손바닥 뒤집듯 빨리 변하는 어려운 시장이다. 그래서 광고 파트너의 특징과 선호를 더욱더 신중히 살핀다. 또한 제품을 팔리게 할 광고를 만든다. 간혹 멋진 그림 연출에만 신경 쓴 나머지 제품이 기억나지 않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지곤 하는데, 나는 아름다운 화면을 위해 제품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철학을 고수한다. 이 신념이 광고주에게 통한 것 같다.
언제나 새로운 걸 원하는 대중은 참신한 CF가 아니면 눈여겨보지 않는다. CF 감독으로서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고자 어떤 노력을 하나? 당신의 성공적인 아이디어 원천이 궁금하다. 많이 돌아다니고 관찰하고 체험한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트렌드를 볼 수 있는 세상이지만 실제 경험하는 건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쌓인 경험은 ‘좋은 것’을 감별할 수 있는 센스로 둔갑한다. 마음속 데이터베이스로 있다가 적재적소에 튀어나온다고 해야 할까? 나에겐 경험과 관찰이 아이디어 뱅크다.
코스메틱 브랜드 ‘슈퍼페이스’를 런칭했다. CF 감독에서 CEO로 변신하는 데 두려움은 없었나? 있었다. ‘하지 않으면 나중에 얼마나 후회할까?’라는 다른 형태의 두려움. 개인적 성향이 ‘해보고 후회하자’에 가깝기에 도전하고 무언가 잃는 것보다 도전하지 않고 미련을 갖는게 나를 더 힘들게 한다. 해보지 않으면 결과를 모르지만 실천하면 끝을 볼 수 있다. 겁먹고 포기하는 건 내 사전에 없다.
이전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지만, 여전히 더 큰 성공을 이루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다. 소년은 야망을 가지라는 독려를 받지만 소녀는 착한 사람이 되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잘못됐다. 예쁘고 소박한 꿈은 휴지통에 미련 없이 버리고 꿈보다 큰 극한의 야망을 품길 바란다. 자신을 과소평가해 ‘난 여기까지다’라고 선을 긋지 말고, 다소 허황될지라도 큰 비전을 가지고 행동해라. 그 이상이 실현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부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성공’은? 스스로 ‘내가 이만큼이나 할 수 있구나’ 하며 자신을 칭찬하는 삶, 내가 나를 인정하는 삶.

리빙 신대륙 개척자 이노메싸 대표 마재철
국내에 북유럽 디자인이란 용어가 생소하던 12년 전 부터 헤이, 무토, 노만코펜하겐 등 뉴 노르딕 브랜드를 국내에 열정적으로 소개한 이노메싸의 마재철 대표.“핀란드 제지 회사의 국내 에이전트에서 일하며 출장기회가 잦았어요. 북유럽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과 디자인 감각은 여러모로 새롭고 놀라워요. 작은 주방도구 하나에도 삶을 더욱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디자인이 담겨 있죠. 이는 분명 언젠가 한국에서도 통할 거라고 확신했어요.” 그냥 북유럽 가구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 삶의 방향을 자연스레 바꿨다. 현명하게도 그는 보다 많은 사람에게 북유럽 디자인 문화를 알리기 위해 브랜드를 독점 판매하지 않고 국내 업체에 유통했고, 곧 북유럽 가구에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국내 인테리어 시장의 북유럽 디자인 전성기를 이끌며 이노메싸를 성공적으로 키워온 그는 최근 뉴 노르딕브랜드에서 벗어나 원컬렉션, 스텔라웍스, 포지아 등 다양한 브랜드를 소개하고 있다.
“새로운 브랜드를 끊임없이 보여준 것이 지금의 이노메싸를 있게 한 원동력입니다. 내일 출장을 떠나는 독일에서도 좋은 브랜드를 발굴해올 거예요.” 더불어 헤이스토어, 노만코펜하겐과 무토를 중점적으로 선보이는 인터로그 등 각각의 브랜드에 집중한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해 대중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중이다. “이노메싸의 전국적 확장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지금처럼 부지런히 일한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벌써 성공이란 마침표를 찍고 싶진 않아요. 더 이상 일할 수 없을때가 온다면 그때 성공 여부를 판단해보고 싶어요.”






기본기의 승리 김영모과자점 명장 김영모
좋아하는 빵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들어선 제과·제빵의 길. 6평 공간에서 시작한 김영모과자점은 어느덧 강남 제일의 제과점으로 자리 잡았고, 열일곱 소년 김영모는 38년 만에 제과 명장으로 거듭났다. 대형 체인이 꽉 잡고 있는 제빵업계에서 이례적 성공이다. “어릴 적부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만들겠다는 분명한 꿈을 품었습니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 꿈이 있었기에 50년간 한 우물만 팔 수 있었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뚜렷한 신념으로 포기하지 않는 장인정신이 중요하다고 명장은 말한다.
식품에서 맛은 기본이다. 그런 만큼 맛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데, 김영모에게 그 무엇은 ‘철저한 관리’다. 고객이 믿고 먹을 수 있는 안전한 식품을 만드는 게 최우선이라고. 김영모과자점에는 성공을 안겨준 대표 빵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신제품을 개발한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빵을 만드느냐고 하지만 저는 대한민국 제과 명장입니다. 제과 명장이 빵을 만들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할까요?” 매년 바뀌는 식품 트렌드를 살피는 김영모 명장이 국내 최초로 천연, 유산균발효법을 개발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의 꿈은 김영모과자점의 철학인 ‘소중한 사람에게 건강과 행복을 주는 맛있는 빵’을 오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철학을 후학 양성으로 고수하려는 김영모 명장은 조언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스스로 최고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최고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소비자의 인정이 필요하고, 서두르지 않고 기본기를 쌓아야 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죠. 충분한 지식을 갖추면 위기의 순간이 닥쳤을 때 ‘포기’가 아닌 ‘대처’를 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 뮤지컬의 리딩 맨 연출가 왕용범
<프랑켄슈타인>의 성공으로 한국 창작 뮤지컬의 새역사를 쓴 왕용범의 출발점이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합창 대회를 지휘하고 연극을 만들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교회에서 공연한 뮤지컬 <가스펠>을 계기로 뮤지컬에 흥미를 느꼈다. 방학 내내 이 공연을 각색해서 다시 올렸다. 1998년엔 <서푼짜리 오페라>를 번안해 한국 최초의 랩 뮤지컬을 만들었다. 성공적이었고 2000년 일본 요코하마에 초청받았다.
<프랑켄슈타인>은 한국 대극장 창작 뮤지컬 최초로 해외에서 라이선스 공연을 했다. 매출도 100억이 넘는다. 성공 요인이 뭘까? 연출가로서 안정되자 다음 단계가 고민됐다. 주변에선 제작을 하라고 했지만 제대로 된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콘텐츠다. <프랑켄슈타인>은 무대, 의상, 조명, 연출, 음악 등 최선을 다해 퀄리티를 높였다. 피가 마를 때까지 열심히 해야 한다. 예술은 장인의 손에서 탄생하니까, 모두가 장인정신을 가져야 한다. 땀 흘려 열심히 일할수록 존중받는 사회를 꿈꾼다. 한국 뮤지컬은 아직 땀 닦고 쉴 때가 아니다. 가능성을 믿고 넓혀 나가야 할 영토가 무궁무진한 블루오션이다.
한국 뮤지컬은 <프랑켄슈타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화를 실감하나? 일본에서 처음 공연할 때 입석까지 팔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고, 2020년에 앙코르 공연을 선보인다. 그동안 한국 뮤지컬계는 유통시장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을 시작으로 세계로 진출하는 길이 열렸다. <프랑켄슈타인>과 <벤허>는 곧 중국에도 진출한다. 공연이 성공하니까 점점 한국 창작자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예전엔 한국이 일본에 배우러 갔지만 이제는 반대다. 내가 한국 뮤지컬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 한몫했다는 자부심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낀다.
스스로 생각하는 대표적 성과는 뭔가? 내 성과의 시작은 <프랑켄슈타인>이다. 그 전까지는 성장 과정이었고, 마지막엔 <노인과 바다>를 올리고 싶다. 그때쯤엔 인생을 더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데뷔 때부터 승승장구했다. 어려움은 없었나? IMF 때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 하루 3시간만 자면서 학비를 마련했다. 유학을 포기하고 젊은 날 재능을 무기 삼아 돈을 벌면서 무대, 음향, 조명 크루를 다 겪고 삶의 드라마를 배웠다. 당시 고생한 기억 때문에 지금 같이 일하는 스태프를 존중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다. 지금은 젊을 때 겪은 가난이 감사하다.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나? 슬럼프가 하루 건너 하루씩 오는 것 같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내 고통의 깊이만큼 작품이 잘 나온다. 쉽게 되는 날도 있지만 그럴 땐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 공연을 보는 관객이 행복하려면 예술가가 고통스러워야 한다.
공연을 위한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나? 여행, 책, 영화에서 소재를 얻는다. 예전엔 공연도 많이 봤는데 요즘엔 쇼윈도를 주목한다. 상업적 이미지를 보면서 트렌드나 예술의 방향을 읽는다.
다음 공연도 기대된다. 어떤 공연이 있나? 일본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홍콩 영화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을 같이 작업 중이다. 빠르면 내년 연말에 첫 작품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켄슈타인>과 <벤허>에 이은 신 3부작으로 단테의 <신곡>도 준비하고 있다.
뮤지컬 연출가로서 꿈이 있다면? 한국 뮤지컬은 관객의 사랑으로 소중한 싹을 틔웠다. 싹이 꽃을 피우려면 아직 많은 영양분이 필요하다. 기업과 투자자가 관심을 가진다면 한국 뮤지컬의 넓은 대지에 아름다운 꽃밭이 생길 것이다. 그 성장에 공헌하고 싶다.






태생부터 스포츠인 GSM 대표 & 스포츠 마케터 김재현
자타공인 한국의 1세대 스포츠 마케터 김재현은 배구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태생부터 스포츠와 인연이 깊다. 스포츠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강변가요제 본선에 진출하고, 음반도 2장이나 냈다. “10~20대를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현장에서 보냈다. 스포츠와 음악을 융합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다 스포츠 마케팅 시장을 개척하기로 결정, GSM을 설립했다.” 물론 그 시절 함께 꿈을 꾼 사람이 많지만 김재현 대표는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다양한 성과를 냈다. “넥슨과 함께 풋살 돔구장 설치를 지원했고, 월드컵 때마다 개최 국가 언어로 한국 축구 기록집을 낸다. 그 외에도 스포츠인을 장려하는 토크 콘서트, 출판기념회, 시상식 등 빅이벤트를 주관, 대행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 결과물로 끝이 아니라 사회 공헌 프로젝트와 연계해 공익성을 추구한다. “가슴이 뛰는 일에 올인했다. 처음엔 이 분야에서 취업할 곳도 마땅치 않았지만, 이 길을 걸으면서 책임감이 생겼다. 점점 스포츠 마케터를 위한 제대로 된 길이 열리는 데 보람을 느낀다.” 특히 프로배구의 출범에도 큰 역할을 했다. “대한배구협회 창고에서 프로배구 출범 마케팅을 총괄, 프로배구의 시작을 함께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성공의 열쇠로 꼽은 그는 현재 장애인을 위한 체육학교 설립을 추진 중이며, 모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자생력을 갖춘 프로구단 창단도 꿈꾼다. “난 뜨거운 태양에 뛰어들어본 사람이다. 나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꿈을 위해 쉴 새 없이 뛰었다”는 그의 말은 김재현표 스포츠 마케팅을 집약한다.

동시대 여성의 대변인 디자이너 표지영
건축적 실루엣에 낭만적인 컬러와 예술적 디테일을 더한 그녀의 옷에는 존 체임벌린과 콘스탄틴 브란쿠시의 조각 작품, 밀턴 에이버리의 페인팅 등 예술적 영감이 살아 숨 쉰다. “예술과 현실 감각의 적절한 균형을 이룬 세련미가 레지나 표의 시그너처 디자인이에요.” 한국보다 영국, 미국 등지에서 먼저 인정받으며 세계 60개국 120여 개의 온·오프 매장에서 만날 수 있는 자랑스러운 브랜드, 레지나 표. 한국에서 대기업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녀가 런던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패션 브랜드로 인정받기까지 어려움도 많았다. “세일즈 에이전트가 사업을 접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조언하기도 했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간 해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컬렉션에 쏟아부었어요. 강렬한 컬러, 추상미술을 연상시키는 패턴 등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들자 반응이 폭발적으로 몰려왔어요.” 그녀의 옷은 동시대 여성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간파했다는 평을 듣는다.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여성스러움이 깃들어 있고 실루엣이 명료해 활동하기 편하지만 평범하지 않다. 현대 여성을 위한 워크웨어인 동시에 나이트 룩까지 아우를 수 있는 옷이다. 그녀는 9월 중 서울에 팝업 쇼룸을 오픈하고 한국 고객을 만날 예정이다. 런던에 이어 뉴욕 컬렉션까지 진출해 1년에 네 번의 쇼를, 주얼리 라인까지 런칭하며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남들과 똑같이 하면서 남보다 성공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해요. 잠도 덜 자고, 놀기도 덜 놀아야죠. 희생하고 노력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생각해요.” 

 

에디터 리빙팀, 피처팀
사진 선민수(인물), 박지홍(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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