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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18 LIFESTYLE

세비야의 거의 모든 하루

  • 2018-04-08

여행 작가 변종모가 추천하는 4월의 여행지, 스페인 세비야.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여행이란 얼마나 다행인가. 때로는 생활에서 아주 많이 밀려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이왕 떠났으니 최대한 미적거릴 수 있는 날들을 타당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다행인가. 잦은 여행에서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왠지 뿌듯하고 죄책감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특히 세비야에서 그랬다. 아니, 자꾸만 변명을 만들어가며 그러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도착한 도시에서 자꾸만 마음이 급해지고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느 방향으로 나서든 그렇게 됐다. 걷다가 멈춘 발걸음을 수도 없이 되돌리게 한 핏줄 같은 골목과 그 사이의 햇볕과 바람과 그림자까지 내 속에 새겨진 도시. 잠시 쉬어가겠다는 마음으로 도착한 세비야에서 그렇게 발이 묶여버리고 말았다.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도시라고 말하던 여자가 생각났다. 세비야에서는 무얼 하면서 지내는 게 좋을지 묻는 내게 “그냥 아무 방향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걷기만 하면 되는 곳이야” 그렇게 말하고 웃는 그녀에게 신뢰를 느꼈다. 2시간 남짓 버스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보다 세비야에 더 자주 간다고 했다. 유럽의 북쪽 끝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가 같은 유럽 땅의 가장 남쪽 나라 작은 도시를 사랑하게 된 이유를 알 것 같다. 도시 규모가 아담해서 만만하게 느껴져 좋았고, 아담한 것들 속에서 섬세하게 느껴지는 사소한 것들까지 흥미로운 풍경이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방대하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히랄다 탑에서 본 구시가지

이곳에 도착하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한 번쯤 지나가야 하는 대성당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1402년에 완공된 낡고 거대한 대성당 앞으로 날렵한 최신식 트램(Tranvia)이 출근길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커다란 바퀴를 굴리며 경쾌하게 트램 곁을 달리는 마차와 차와 자전거, 움직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동시에 행진하는 대성당 앞. 스페인에서 가장 크고 유럽에서도 세 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대성당은 안과 밖 모두 화려함의 절정을 이루는데, 사람들은 여기서 적잖이 실랑이를 벌인다.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곳을 보려는 사람들 사이의 흔한 아우성이다.






메트로폴 파라솔

성당 곁에 우두커니 서 있는 히랄다 탑(La Giralda)에 올라 아름답게 펼쳐진 도시를 이미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마음이 급해지기도 할 것이다. 98m 높이로 우뚝 솟은 오래된 탑을 뱅글뱅글 돌면서 바라보는 파노라마는 매시간 달라지는 풍경에 누구라도 반할 만하다. 나는 숙소와 대성당이 작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성당 앞을 지나가는 일이 좋았다. 종교가 없지만 골목을 지날 때마다 왠지 경건해지는 마음 때문에 내가 조금 착해졌거나 좋은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1 과달키비르 강의 풍경   2 스페인 광장의 화려한 타일장식

그 착각을 안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골목을 따라가면 착각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구조물이 보인다. 메트로폴 파라솔(Metropol Parasol). 사진으로만 볼 때는 놀이동산이거나 조형물의 일부분처럼 이상해 보였지만 이제는 세비야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옛날 건물이 숲이라면 메트로 파라솔은 숲 위로 떠 있는 뭉게구름 같기도 하다. 기존의 재래시장을 현대식으로 개조하면서 이제는 복합 문화 공간이 되어 더 많은 사람이 찾는다. 나는 이 건물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기보다 이런 과감함이 좋았다. 오래된 박물관 같은 도시에 생뚱맞게,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자리 잡은 막무가내 정신이 마음에 들었다.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는 구시가지는 박물관의 기념물처럼 낡았지만 묘한 어울림이 매력적이다.






스페인 광장의 밤 풍경

서울의 한강처럼 도시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과달키비르강(Rio Guadalquivir)을 따라 구시가지를 벗어나면 가장 볼만한 곳이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이다. 오래전 배우 김태희가 붉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어느 통신사 광고를 찍은 곳으로, 아마도 우리나라 여행객이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이 아닐까 싶다. 이곳은 아니발 곤살레스라는 스페인 건축가가 설계한 세비야의 대표 광장이다. 고고학 박물관, 예술과 풍습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정교하고 화려한 모자이크 타일이 눈길을 끄는데, 그 덕분에 어쩌면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대접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거대한 건물 앞으로 수로가 흐르고 그곳에서 보트를 타는 사람들과 정원에서 마차를 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도 잠시 과거로 흘러가거나 이미 과거 속 어느 가문의 누군가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3 세비야의 전통 플라멩코 공연   4 플라멩코 의상을 파는 골목의 상점들

이미 밤이 되어버렸지만 태양이 기울기 시작하는 시간부터 곳곳에서 어김없이 펼쳐지는 플라멩코 공연은 급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묶는 데 또 한몫을 한다. 각 공연장에서 공연하는 무용수들과 공연팀이 나와 짧은 시간 동안 거리 공연을 펼친다. 특히 대성당 근처에서 펼치는 공연은 많은 사람에게 박수를 받는다. 스페인 어디서나 플라멩코 공연을 볼 수 있지만, 플라멩코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세비야의 화려한 공연은 반드시 봐야 한다. 도착한 날 주인장이 추천해준 플라멩코 춤 박물관(Museo del Baile Flamenco, www.museoflamenco.com)의 공연은 잊을 수가 없다. 화려하고도 애절한 교감의 시간, 공연자와 관객이 하나 되는 시간은 그야말로 심장을 두드리는 거리에 있다.

스페인은 플라멩코를 제외하고는 완성될 수 없는 나라임이 틀림없다. 골목마다 쇼윈도에는 화려한 플라멩코 의상이 걸려 있고, 어디서나 예리한 기타 연주와 집시들의 깊이 있는 노래가 들린다. 이 모든 것을 하루에 다 경험해도 좋고, 매일 같은 길을 여러 날 걸으며 경험한 것을 반복해도 좋다. 단언컨대 아무리 반복해도 같지 않을 것이다. 그날의 날씨와 당신을 스치는 사람들이 다르고, 그날 당신의 마음과 생각이 다를 것이므로. 그 다름이 좋아 매일매일 행복할 것이므로. 그래서 당신도 나처럼 자꾸만 변명이 생길 것을 믿는다. 아무려면 어떤가. 한 번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변명하는 마음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한 번으로는 부족할 거라는 변명이 또 생기겠지. 그녀의 말처럼 아무 방향으로나 걷기만 하면 되는 곳이라 더더욱 변명이 잦아질 것이다. 무수히 갈라진 골목 어디선가 그녀가 다시 나타나 “내 말이 맞지?”라며 커다랗게 웃을 것만 같은 곳.



세비야 골목골목 누비기 Tip :
세비야의 가장 큰 장점은 여행객이 갈 만한 거의 모든 곳을 걸어서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구시가지의 대성당 근처에 숙소를 정한다면 좀 더 유리하다. 대성당 근처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는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세비야의 거의 모든 것을 만나게 된다.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대성당과 히랄다탑을 방문해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면서 방향을 익혀두는 것도 좋다. 또한 골목을 벗어나 강을 따라가며 만나는 황금의 탑이나 산텔모 다리에서 보는 풍경, 세비야 대학교 캠퍼스를 경험하는 것도 추천한다. 세비야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특징인 다양한 타파스 접시에 담아내는 음식 또한 매력적인 곳이다. 어느 카페를 가더라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플라멩코 공연을 처음 관람하는 사람이라면 플라멩코 춤 박물관을 추천한다. 플라멩코의 정석을 보여주는 공연장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이곳을 경험한 뒤 자신이 원하는 분위기의 공연장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세비야는 교통의 요지로 특별함을 더하는 곳이기도 하다. 국제버스를 타면 포르투갈로 쉽게 연결되고, 스페인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어렵지 않게 다양한 교통편을 이용할 수 있다.

 

글·사진 변종모
에디터 엄혜린(eomering@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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