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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7

그들의 주방에서 일어나는 일

예술가의 키친에서는 왠지 근사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그곳에서 피어나는 예술의 영감과 레시피를 찾아서.

1 올라푸르 엘리아손 스튜디오 내 키친의 모습. 평범한 음식도 그의 이름을 얹으니 특별해 보인다.
2 수련을 그린 화가 모네의 책에 등장하는 작품 .

에디터가 덴마크 출신 예술가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쿡북 <스튜디오 올라푸르 엘리아손: 키친>을 처음 맞닥뜨린 건 서점의 아트 북 섹션이 아닌, 삿포로에 있는 한 호텔의 레스토랑에서다. 식당 한쪽 벽면에 즐비한 요리책 사이로 ‘올라푸르 엘리아손’이라는 이름과 ‘키친’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아티스트의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에 솔깃해 밥을 먹다 말고 일어나 책을 꺼내 들었다. 그는 맥주와 초콜릿 창고였던 베를린 스튜디오에 직원용 키친을 만들었다. 그리고 레시피와 일러스트레이션, 이미지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368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은 그의 스튜디오에 있는 주방에서 창조한 100여 가지 레시피로 가득하다. 어디 레시피뿐인가! 그의 미감이 돋보이는 오색찬란한 재료 사진은 화집을 연상시킨다. 2016년, 독일어로 발간한 책은 영어와 프랑스어에 이어 지난 3월 8일엔 일본어로 출간할 만큼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다.
‘공간 예술’과 ‘참여 예술’의 새 역사를 쓴 올라푸르 엘리아손은 작품만큼이나 음식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아티스트다. 그는 <가디언스>와 인터뷰에서 팀원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키친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의 어시스턴트와 스태프는 매일 유명 셰프가 만드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일본의 조각가 아사코 이와마가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키친에서 2005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9년 동안 셰프로 일하기도 했다. 스튜디오의 키친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운영하는데, 근처 맛집에 가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자유를 주기 위해 하루를 쉰다고. 직원용이지만 종종 손님을 초대해 성대한 요리를 대접하기도 한다. 이곳은 인스타그램 계정(@soe_kitchen)도 따로 운영하니 관심이 있다면 들러보자. 컬러풀한 음식 사진으로 채운 인스타그램 피드를 살필 때마다 언젠가 그의 식당에 가보고 싶다는 소망이 커져만 간다. 예술가 아이웨이웨이와 영화배우 메릴 스트립 등 셀레브러티도 자주 찾곤 하는데, 메릴 스트립이 키친에 방문했을 때도 자리를 비웠다는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과연 에디터를 맞이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바다 건너 베를린에 있는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초대는 어렵더라도, 한국이라면 기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멀지 않은 서울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바로 학고재갤러리와 현대카드 프로젝트 등으로 알려진 건축가 최욱이 이끄는 원오원 아키텍츠 사무소다. 최욱 대표 역시 사무소에 직원을 위한 주방을 만들었고, 심지어 ‘또’라는 귀여운 이름도 붙였다. ‘또’는 최욱 건축가가 어릴 때 즐겨 한 뽑기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꽝’이 아닌 ‘또’를 뽑았을 때 느낀 기쁨을 직원들과 함께 누리고 싶다는 의도가 정감 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미식가이자 와인에 대한 조예가 깊은 그는 한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과정이 건축과 닮았다. 잘 먹어야 좋은 건축이 나온다”라고 말할 정도로 음식의 중요성을 어필했다. 그의 주방은 원래 김동길 박사의 태평양시대위원회 사무실이 있던 자리다. 과거 김동길 박사는 생일마다 지인과 함께 냉면과 빈대떡을 만들어 먹곤 했는데, 건축가 최욱이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주방을 만든 것이다. 최욱의 아내이자 설치미술가인 지니 서가 직접 디자인한 그릇엔 한식 전문 셰프가 만든 음식이 담기고, 주방은 음식 전문 다큐멘터리 전문 PD 이욱정 등 다양한 인물을 초대해 강의를 여는 장소로도 이용한다.
물론 팩토리를 연상시키는 대규모 스튜디오와 커다란 주방이 함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주방을 그대로 작업실로 쓰는 예술가도 있다. 호주의 판화가 울리케 스텀(Ulrike Sturm)은 에서 “주방은 내 스튜디오나 마찬가지다. 저녁을 먹고 식기를 정리한 다음, 미술 재료를 가져와 작업을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작가가 식사를 마치고 나면 부엌은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탈바꿈해 테이블 위엔 커틀러리 대신 판화 도구가 놓인다. 사실 처음엔 집이 좁아서 작업 공간을 따로 마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보다 넓은 집에 사는 지금도 울리케 스텀은 여전히 주방의 다이닝 테이블에 앉아 작업한다. 삶과 가까운 주방에서 뿜어내는 특유의 향기가 그녀의 예술적 영감을 자극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렇게 사적이면서 공적인 장소로 쓰이는 예술가의 키친이 궁금하다면, 책으로나마 대리 만족해보자. 수련을 그린 예술가 클로드 모네의 <모네의 테이블>과 <모네의 팔레트 쿡북>, 미국의 페인터 조지아 오키프의 <화가의 키친: 조지아 오키프의 키친 레시피>, 액션 페인팅의 선구자 잭슨 폴록의 <잭슨 폴록과 저녁식사>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예술가의 책 제목만 봐도 이들의 키친과 요리법이 궁금해진다. 그중에서도 멕시코 예술가 프리다 칼로의 쿡북을 놓칠 수 없다. 사고로 얻은 장애와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잦은 외도로 신체적.정신적으로 치열한 삶을 살다 간 그녀에게 예술만큼이나 위안을 선사한 것은 바로 요리였다. 그녀의 요리법은 리베라와 전처가 낳은 딸 루페 마린이 <프리다 칼로의 축제>라는 책으로 엮었다. 프리다 칼로가 가족과 친구에게 만들어준 100여 가지 요리의 레시피, 스크랩북, 그녀의 삶 중 축제와 같던 행복한 순간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한국의 현대미술 애호가 장성주가 총 13명의 다양한 예술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레시피를 엮어 발간한 책 <아트 러버 쿡북>도 있다.
작년 이맘때 방한한 스위스의 디자인 스튜디오 ‘빅게임’과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빅게임의 멤버 그레구아르 장모노, 엘리크 프티, 오귀스탱 스코 드 마르탱비유 등 세 디자이너에게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방식을 묻자, “넓은 사무실에서 매 순간 의견을 나눠요. 특히 부엌이 아주 중요해요. 같이 요리하고 식사하면서 주고받는 아이디어가 중요한 영감이 될 때가 많거든요”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들은 사무실 내에 있는 키친에서 함께 요리하고, 커다란 테이블에서 식사를 즐기며 예술적 감성을 공유한다.
지난 1월 테이트 모던에서 개최한 워크숍 ‘스튜디오 콤플렉스’는 아티스트 스튜디오의 미래를 제안했다. ‘사람들은 종종 공원 벤치, 펍, 주방 같은 곳에서는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발전하고 전통적 개념의 스튜디오가 사라지면서, 예술가는 다양한 장소에서 예술을 탄생시킨다’라는 주제로 펼쳐졌다.
많은 예술가가 주방을 작업실로 쓰거나 혹은 작업의 기폭제가 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주방에서 함께 요리하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다양한 교류가 이어지고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는 예술가가 어느 집이든 하나씩은 꼭 있는 주방이라는 필수 공간을 놓칠 리 만무하다. 방에 있는 책상보다 주방의 다이닝 테이블에서 글을 쓰곤 하는 에디터의 습관에 어쩐지 자부심이 생긴다. “책상 놔두고 거기서 뭐 해?”라는 어머니의 질문에 대답할 만한 그럴싸한 이유가 생겼다.




3 <잭슨 폴록과 저녁식사>의 한 부분. 이렇듯 많은 예술가가 자신의 레시피나 요리에 대한 관심을 책으로 펴냈다.
4 주방을 작업실로 활용한 울리케 스텀이 자신의 주방을 판화로 표현했다.
5 예술가 모네가 직접 쓴 레시피.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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