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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18 ARTIST&PEOPLE

기억에 대한 이야기

  • 2018-03-12

써니 킴 작가는 교복을 입은 소녀들, 그리고 이들이 존재하다 어느새 사라진 풍경을 그린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는 막을 내렸지만, 옛 시간과 상실의 기억을 그린 그녀의 작품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써니 킴
14세에 미국으로 건너간 써니 킴은 뉴욕 쿠퍼 유니언 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뉴욕 헌터 대학원에서 종합매체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2001년 갤러리사간, 일민미술관, 갤러리현대 16번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쿤스트할레 빈, 주영 한국문화원, 대구미술관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가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정부미술은행,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에 그녀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써니 킴 작가는 중학생 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성장한 후 20대 후반에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짧은 유년기 기억, 상징처럼 머릿속에 떠도는 이미지인 교복을 입은 소녀는 갑자기 바뀐 환경에 대한 무력감과 상실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2017>전에서 그녀는 초상과 풍경 회화에 3차원 구조물과 영상을 배치해 시간과 기억에 대한 자신만의 서사를 보여주었다.




1 <올해의 작가상 2017>전에서 ‘어둠에 뛰어들기’란 주제로 연출한 써니 킴 작가의 전시 공간.
2 지난 시간과 기억을 이야기하는 작가 써니 킴.

작업실 벽에 붙어 있는 사진과 엽서들이 인상적입니다.
오래된 인물 사진에 애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행하면서 엽서를 사 모으고 플리마켓에서도 옛 사진을 삽니다. 옛 사진을 직접 엽서로 만들기도 해요. 제 삶에서 ‘기억’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기억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닌, 저 멀리 지난 시간에 대한 이야기죠. 대체로 막 일어난 현상, 지금이라는 시간은 제가 느끼기엔 너무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정확한 생각을 하기 어려워요. 그렇게 보면 저는 조금 느린 사람이기도,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들춰보는 이미지는 옛날 것이 많습니다. 이미지뿐 아니라 영화나 책 등 모든 관심사는 오래된 것, 기억과 시간에 관한 것이죠. 어릴 때부터 누군가의 흔적을 찾는 걸 좋아했어요. 누군가 쓰던 물건을 줍거나 발견해, 이 물건이 어떤 기억을 품고 있을까 상상하는 일이 즐거웠죠. 그런 맥락에서 ‘지난’ 것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아주 먼 과거보다는 가까운 과거, 어렴풋이 남아 있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듯합니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한국에 부재했던 시간이 제게 영향을 미쳤어요. 제게 시간이란 앞뒤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기보다 어렴풋이 추상적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 작업실에서는 인왕산이 보였어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자연스레 연상되는 풍경이었죠.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가 이 동네에 과거에는 누가 살았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옛글을 찾아 읽는 등 리서치를 하고, 그 지식과 감정을 가지고 인왕산에 간 적도 있죠. 300년 전, 같은 장소에 살고 그것에 관해 쓰고 그린 사람의 눈으로 지금의 내가 바라본 느낌을 작품에 담고 싶었습니다. 그런 행동은 결국 나 자신은 누구인가에 관한 물음으로 다가왔죠. 하지만 이는 작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순전히 제 호기심과 관심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생각과 행동이 자연스레 작업으로 연결됐다고 할 수 있어요.




3 풍경(디테일 컷), 합판에 채색, 철사, 석고붕대, 거울, 싱글 채널 비디오 루프, 244×732×244cm, 2014~2017
4 우물,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60×120cm, 2017
5 통로,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12×138cm, 2016

교복도 그렇게 자연스레 나타난 모티브인가요?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교복을 입은 소녀를 어떻게 구상했는지 궁금합니다.
어릴 적 한국에서 자라며 주변에서 많이 본 게 교복이었습니다. 무의식중에 교복 입은 소녀가 곧 내 모습이 될 것으로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런데 갑작스러운 이민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죠. 미래의 모습이 사라진 겁니다. 그렇다고 크게 충격적이지는 않았어요. 다만 그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스레 교복의 이미지가 튀어나왔습니다. 유년기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알고 있던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무력감과 상실감…. 이런 감정 하나하나가 교복을 입은 소녀라는 상징으로 나타난 거죠.

초기 작품과 비교할 때 최근에 그린 소녀 작품은 표현 방법에서 분명한 변화를 보입니다. 배경이나 묘사가 단순해졌고, 동시에 컬러의 채도와 명도를 통해 더욱 깊고 강렬한 효과를 준 것으로 보여요.
초기에는 상징적인 이미지로서 마치 판화로 찍어낸 듯한 이미지로 그렸습니다. 기억에 의존한 이미지를 그려낸 것이어서 디테일을 없애고 플랫하게, 퍼스널한 터치를 배제하고 싶었죠. 나중에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현실에 기반을 둔 전형적인 구상회화는 아닙니다. 그래서 부유하는 듯한 초현실적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올해의 작가상 2017>전에서 ‘어둠에 뛰어들기’란 주제로 회화와 영상, 오브제가 어우러진 공간을 연출했습니다. 2차원 회화에서 3차원 공간으로 내러티브가 확장된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전시를 어떻게 구상하고 구현했는지 궁금합니다.
전시를 위해 공간이 주어졌고, 이를 해석하고 풀어내는 건 제 몫이었습니다. 천장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오는 전시 공간을 보자마자 흥분했어요. 우선 제 작품이 놓일 공간과 시간 속에 자연스럽게 빛이 스미게 하고 싶었죠. 더불어 넓은 전시 공간을 산책길과 같이 구조성을 갖춘 공간으로 연출하려 했습니다. 2012년 배은아 큐레이터와 함께 만든 첫 퍼포먼스 ‘Still Life’는 ‘그림 속 소녀가 현실로 나온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2014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선보인 두 번째 퍼포먼스 ‘Landscape’는 아예 무대를 배경으로 조명과 음향 요소까지 넣었습니다. 그림 속 2차원의 소녀가 3차원의 공간으로 나오게 되면 어떤 공간 속 동선이 있어야 했죠. 이러한 퍼포먼스는 제게 평면을 끄집어내 수많은 겹으로 만드는 듯한 느낌을 줬습니다. 그 과정을 영상으로 남겼는데, 그 영상이 이번 전시의 설치 속으로 들어오면서 소름 끼치도록 딱 맞아떨어졌어요. 기억의 흔적이 3차원으로 들어와 다시 빛으로 투영되어 2차원으로 들어가는, 3차원과 2차원이 계속 반복되는 듯한 과정이 놀라웠습니다. 퍼포먼스는 제게 큰 실험이었고, 회화에 대해 다시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회화의 주요소인 정물, 초상, 풍경의 트릴로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6 Drive,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00×125cm, 2008
7 교복 입은 소녀들,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각각 162×75cm, 2009~2017
8 Untitled,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50×250cm, 2002

<시간과 기억 그리고 그 안에 투영하고 반추하는 주제가 초상과 풍경으로 나뉘는 듯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돋보이는 작품은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풍경’이었나요?
풍경은 소녀들이 사라진 세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깊이 들어가면 또 다른 의미가 되죠. 소녀가 떠나면, 남은 풍경은 풍경끼리 서로 연결 고리를 만들며 어떤 상태를 유지하고 살아난다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래서 풍경화라고 명확한 카테고리로 규정하기보다는, 회화가 지닌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작가님의 정체성과 마음의 상태가 풍경화로 나타났다는 말을 한 인터뷰 기사에서 읽었습니다. ‘풍경’보다는 ‘마음’이라는 말이 와 닿았습니다.
이번 전시를 ‘어둠에 뛰어들기’라고 명명한 이유는 제가 전시를 준비하면서 견지한 태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끝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맹목적으로 뛰어드는 절대적 행동, 뛰어들지만 불투명하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듯한 느낌을 표현한 것이에요. 그런 감정 덕에 오히려 보다 집중할 수 있었고 동시에 자유로웠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하는 것도 그 ‘마음’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한국에 돌아왔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했다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는 설치 작업을 많이 했지만, 한국으로 오면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회화가 아주 중요해졌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국’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아직도 배회하는 듯합니다. 이렇게 상실한 것을 부여잡으려는 마음이 작품으로 나타났다고 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는 이제 막을 내렸습니다.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지난해는 여러모로 정신없었습니다. 대중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연말부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특별한 것은 없어요. 단지 작업을 계속할 뿐입니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준비하면서 집중하고 몰입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작품에 관해선 초상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디터 황제웅(hjw1070@noblesse.com)
강보라(프리랜서)  사진 JK(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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