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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17 LIFESTYLE

한 끼의 예술

  • 2017-12-04

한때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라는 광고 카피가 유행했다. 이제 양보해야 할 건 따로 있다. 예술을 ‘보다’에서 ‘맛보다’로 양보해야 할지 모른다.

김가람의 ‘4ROSE’s Club Box’(2016년).

모든 건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됐다. “전시해요. 와서 밥 먹고 가요.” 약속 시각은 정오, 장소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로비. 약속 장소에 다다르자 멀리서 손짓하는 작가가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미술관 로비엔 작품이 아닌 테이블이 가득했고, 수십 명의 사람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날 작가는 내게, 그리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그럴싸한 식사 한 끼를 대접했다. 조금 당황한 상태로 ‘예술가의 런치 박스’라 적힌 브로슈어를 펼쳐 들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문 순간, 마치 진짜 레스토랑처럼 스태프가 돌아다니며 식전 빵을 집게로 집어 나눠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나를 초대한 김가람 작가는 2014년부터 ‘Sound Project’라는 프로젝트 음원을 발매하고 있는데, 그날 테이블 위에 곱게 세팅한 식사는 모두 작가가 낸 음원에 숨어 있는 음식이라고. 식사를 마친 후 나를 포함해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은 작품의 공동 창작자가 됐다.
“미술관에서 한 끼의 예술을 맛보세요”라는 솔깃한 문구를 내세운 ‘예술가의 런치 박스’는 2013년부터 꾸준히 진행 중인 서울시립미술관의 인기 프로그램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점심시간을 활용해 예술가와 참여자가 함께 밥을 먹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예술가의 런치 박스’는 해마다 봄 그 즈음해 라인업이 미리 올라올 만큼 인기가 높다. 꾸준히 찾는 이가 많아 매진을 피하려면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예약은 필수다. 2년 전 기억이 아직 생생한 걸 보면 미술관에서 밥을 먹고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것 자체가 꽤 짜릿한 경험인 듯하다.
몇 년 전 인천의 작가들이 버려진 공간을 문화 예술 전시장으로 탈바꿈한 ‘수봉다방’에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당시 수봉다방의 개관전에서도 작가는 요리를 대접했다. “음식 재료를 가져오면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과 바로 교환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교환한 요리 재료로 부대찌개를 만들 예정입니다. 수봉다방에서 맛있는 밥 먹고 가세요”라는 안내문이 구미를 당겼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과 교환’할 수 있다는 건 작가의 작품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 과정은 이렇다. 먼저 작가가 자그마한 캔버스에 부대찌개를 만들 음식 재료를 그린다. 햄, 파, 달걀, 만두, 라면, 쌀 같은 재료를 하나씩 그려 전시한 다음, 파를 들고 온 관람객에게는 파 그림을 주고 라면을 갖고 온 사람과는 라면 그림과 교환하는 식이다. 작가는 그렇게 모은 재료로 직접 요리를 만들고 관람객과 나누어 먹었다. 파 한 단 값에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그럴싸한 식사까지 할 수 있었다. 박혜민 작가의 ‘밥 먹고 가세요’ 프로젝트는 부대찌개로 시작해 떡만둣국과 자장면까지 이어졌다.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사람들과 직접적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이야기와 기억이 곧 작품이 됩니다”라는 박혜민 작가의 말처럼 이런 프로젝트는 작가에게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일 거다.







1 레스토랑을 방불케 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예술가의 런치 박스’.   2 아스펜 아트 미술관에서 열린 ‘Artist-Curated Lunch at SO Cafe’ 참여자들.   3 박혜민 작가가 ‘밥 먹고 가세요’ 프로젝트를 위해 그린 재료 드로잉.

예술가가 미술관에서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받았다면, 이번엔 예술가가 선택한 레시피로 만든 음식을 먹을 차례다. 콜로라도에 있는 아스펜 아트 미술관은 작년에 ‘Artist-Curated Lunch at SO Cafe’를 선보였다. 2016년 열린 라이언 갠더(Ryan Gander)의 전시〈Make Every Show Like It’s Your Last〉가 끝을 향해 가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미술관과 작가가 마련한 자리다. 라이언 갠더는 미술관의 SO 카페를 위해 특별한 메뉴를 고안했다. 헝가리 출신 건축가 에르뇌 골드핀게르(Erno Goldfinger)와 아티스트 어설라 블랙웰(Ursula Blackwell) 부부가 런던 햄스테드히스에 있는 자택에서 파티를 열어 손님을 초대한 적이 있는데, 라이언 갠더는 당시 그들이 선보인 음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현대화해 재해석했고, 단 하루 동안만 미술관 카페에서 그 레시피로 만든 요리를 판매했다. 당시 전시 연계 프로그램 중 가장 반응이 좋았다는 후문이다.
15년 전, 리크릿 티라바니야가 뉴욕 303 갤러리에서 관람객에게 밥과 태국식 커리를 대접한 건 미술 역사에 길이 남을 퍼포먼스다. 작가가 갤러리를 식당으로 탈바꿈한 전시〈untitled(free)〉(1992년)는 당시로선 상당히 획기적인 프로젝트였다. 이 작품은 이후 규모를 확장해 뉴욕 현대미술관까지 진출, 낮 12시부터 3시까지 미술관 레스토랑의 스태프가 타이식 채소 커리와 밥을 준비해 관람객에게 대접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작가는 관람객과 자신, 작품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경계를 뒤흔들었다. 밥을 먹는다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위를 통해 관람객을 쉽게 현대미술로 끌어들인 것. 그때 함께한 관람객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적 행동을 했을 뿐인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예술의 일부가 됐다.
정식 식사를 제공하는 건 아니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아트 앤 런치’ 프로그램도 간단한 다과를 먹으며 현재 열리는 전시를 여러모로 살필 수 있다. 요즘은 미술관에 미슐랭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들어서는 등 부대시설로서 식음료장은 많지만, 전시장이 곧 식당이 되고 작가가 직접 요리를 한다는 건 색다른 경험일 수밖에 없다. 예술가가 손수 마련한 점심을 함께하는 동안 관람객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친근하게 예술을 받아들인다.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것, 완성된 작품을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함께 작품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도 이 프로젝트의 묘미다. 함께 먹고, 마시고, 대화하는 매일의 일상적 행동을 통해 예술은 관람객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간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맛보는’ 순간, 예술은 더는 비일상적 존재가 아니다.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느낀다면, 혹은 미술관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면, 그저 맛보라. 전시장에서 누리는 한 끼의 꿀맛 같은 예술을.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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