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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7 ARTIST&PEOPLE

임계점을 넘어

  • 2017-06-02

익숙한 장소에서 안 해본 일을 해보자.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자. 그게 무엇이든 일단 자세히 들여다보자. 지금 당장 판단할 수 없다면 보류하자. 건축가 황두진과 전시 디자이너 김용주가 지금 하필 떠올린 생각들.

필요한 건 관찰력
용주/ 큐레이터나 전시를 하고자 하는 작가들이 욕심내는 전시 공간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에요. 트래픽이 정말 좋거든요. 하지만 저는 서울관보다는 과천관의 전시 공간이 잘 맞는 것 같아요. 좁고 층고가 낮긴 해도 거기에선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에 모두 풀어낸다는 느낌이 들지 않거든요.
두진/ 여우 같은 전시를 할 수 있단 얘기죠?
용주/ 네. 그런데 서울관은 달라요. 분명 훌륭한 전시장을 갖췄지만, 그 입구에서 공간이 대개 한눈에 보이기 때문에 쥐었다 폈다 하는 어떤 장치적 재미를 주기엔 제약이 있어요.
두진/ 두 공간을 찾는 관람객의 성향은 어떤가요?
용주/ 과천관의 경우 일단 교통이 불편하다 보니, 진짜 그 전시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주로 찾아요. 그래서 서울관 전시보다는 비교적 전시 자체에 대한 리뷰가 많은 편이죠. 하지만 서울관은 많은 이가 화창한 날씨에 삼청동에 갔다가 들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셀카’도 많이 찍죠. 진지하게 전시를 들여다보고 블로그에 작품 위주로 사진을 올리며 리뷰하는 과천관과는 분명 차이가 있어요. 또 두 공간은 건축 형태도 다르죠. 과천관은 격실 구조로 벽들이 서 있잖아요. 그 부분은 ‘열고’ ‘닫고’의 여지를 품고 있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도 재미있죠.
두진/ 그런 건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라 흥미롭네요. 그건 그렇고,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면 요 몇 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가 상당한 변화를 보인 것 같긴 해요. 언제부터인가 업계에서도 소문이 돌더라고요. 거기서 어떤 전시를 했는데, 뭔가 좀 다르다. 그래서 가보니 거기에 ‘디자인실’이 생겼더라. 이런 얘기였죠. 제가 기억하기로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디자인실이 생겨 전시의 퀄리티가 확 올라갔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우리가 이전에 본 전시들은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식이었잖아요. 아카데믹 큐레이션이 그냥 전시가 되어버리는, 그래서 작품이 그 스스로 말하게 하는. 하지만 지금은 전시에 디자인 큐레이션이 들어가니, 같은 콘텐츠라도 조금 더 관람객에게 다가가 그들의 상상력을 촉발하는 것 같아요.
용주/ 맞아요.
두진/ 그럼에도 여전히 전시장에서 ‘디자인’이라는 부분을 감지하는 건 일반 관람객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이긴 해요.
용주/ 사실은 전시 디자인이 힘든 게 바로 그 지점이에요. 더 넘어서도 안 되고, 덜 하면 그냥 방치한 느낌이 드니까요.
두진/ 혹시 그런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 있나요? 미술 전시 디자이너들이 하는 일을 정확히 정의해주는.
용주/ 저는 제 일이 ‘더할 것이 없는 디자인’을 하는 게 아니라, ‘뺄 것이 없는 디자인’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놓여 있으되, 뭔가 이야기를 담되 관람객에게 하나의 ‘괄호’ 같은 여지를 주는 전시를 디자인하는 거죠. 이런 걸 그리어스로 ‘에포케(epoch ̄ e )’라고 하는데, ‘판단의 보류’라는 뜻을 담고 있대요. 한 예로 ‘황두진 소장님은 ( )’라고 했을 때 누군가 그 안에 ‘논리적이다’ 혹은 ‘감정적이다’ 또는 ‘다공성 건축이다’ 같은 이야기를 붙일 수 있잖아요. 그래서 괄호가 존재하는 디자인을 하자, 그런 이야기를 저희 팀 내에선 공유하고 있어요.
두진/ 그럼에도 그냥 자료나 팩트의 나열은 아니어야 하잖아요.
용주/ 그렇죠.
두진/ 개인적으로 용주 씨가 디자인한 전시를 몇 번 본 입장에서 말하면, 그렇게 살짝 한발 물러서는 태도 자체가 되레 힘이 있는 것처럼 보여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실 요샌 건축계에서도 그런 태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죠.
용주/ 어떤 일이 있는데요?
두진/ 일단 우리 사회는 현재 도시환경에 너무 자극이 많고, 건축보다 중요한 것을 위해 건축 자체가 점점 ‘서브’가 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일례로 건축에서 역사적 문화재를 앞으로 어떻게 다룰 거냐, 자연에 대해 건축이 할 수 있는 게 뭐냐, 오래된 동네에 건축이 들어가 할 수 있는 건 뭐냐 같은 걸 고민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여기에도 무슨 답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용주/ 그러니까요.
두진/ 옛날엔 건축가들이 무슨 ‘침’을 놓는다고 표현하기도 했어요. 어떤 지역에 가서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면 그게 자극이 되어 동네가 막 살아나기도 했으니까요. 물론 지금도 그런 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최근엔 건축계에도 확실히 ‘한 듯 안 한 듯’하게 자신을 지우는 건축에 대한 얘기가 많이 퍼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실제 몇몇 사례로 그 결과가 나왔을 때 사람들이 그냥 편안하게 생각하고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용주/ 건축계에도 정말 그런 변화가 있긴 한가 봐요.
두진/ 그렇죠. 하지만 이런 방식이 결코 건축계에선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냥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용주/ 정말 흥미롭고 오래 얘기해야 할 문제 같긴 하네요.
두진/ 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포착해야 할 것이 있어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따져봐야죠. 그런데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여기에 ‘관찰’이란게 있는 거예요. 우리가 확실히 이전에 비해 ‘관찰’을 잘해 생긴 일이라는 거죠.
용주/ 예를 들면요?
두진/ 이전엔 우리가 어떤 분야의 대가를 평할 때 대부분 즉흥적인 인상으로 점수를 준 것 같아요. 이를테면 어떤 병원에 환자가 왔는데 의사가 딱 보더니 “거, 얼마 못 살겠네”라고 했는데 며칠 후 정말 죽었다거나, 어떤 한옥 장인이 집에 문짝을 다는데 그냥 쓱 보고 가서는 톡톡톡 짜서 가지고 왔는데 딱 맞아떨어졌다거나 하는 얘기 있잖아요. 분명 그런 사람이 있었던 건 사실이고 그런 경지를 동경하는 가치관이 존재했으니, 그들을 높이 평가하는 공감대도 형성됐을 거고요. 하지만 요샌 대체로 의사도 정성스레 환자를 봐주고, 문도 더 오랫동안 정확히 관찰해 만들잖아요. 요리할 때도 레시피를 유심히 보고요. 우리가 이렇게 들여다보고 사고하고 하는 것이, 이전에 비해 몇 단계 수준이 좀 올라간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그게 좋은 점이 뭐냐 하면, 내가 굳이 나를 포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용주/ 그렇죠. 그건 맞는 말이에요.
두진/ 네. 그냥 있는 그대로 양념을 치지 않아도 내가 뭔가 좋은 걸 하고 있으면, 그걸 읽어주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심지어 지금은 그런 문화가 점점 확산되는 추세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기를 너무 드러내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봐요. 물론 저도 그런 거대한 움직임에 당연히 동참해야겠다고 생각하고요.
용주/ 그래서 전 점점 ‘관찰력’이 중요해지는 시기라고 믿고 있어요. 그런 움직임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힘 있는 어떤 한 사람의 생각이 모든 걸 지배하는 시대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봐요.
두진/ 개인적으론 한국 사회에서 이런 움직임이 일정 레벨 이상으로 지속될 때, 과연 이 사회가 어떤 걸 만들어낼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요. 지금은 뭔가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관찰력과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김용주와 황두진.

나만의 공원
두진/ 전 요새 ‘공원’의 의미를 조금 넓게 보려 하고 있어요. 내가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맘 놓고 시간을 보내도 되는 상황, 그걸 담는 그릇이 ‘공원’이다. 이렇게요. 그런 의미에서 용주 씨는 서울 안에 ‘나만의 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데가 있나요?
용주/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뒤쪽에 그런 데가 있어요.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요.
두진/ 잠원동 쪽이죠?
용주/ 네. 그리고 한 곳 더 있어요. 동네의 외진 곳에 아무도 모를 것 같은 포장마차가 하나 있는데, 제겐 그곳도 경험이나 기억을 나눌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에요. 나무가 우거진 공원은 아니지만, 공원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곳.
두진/ 그런 건 건축이 하기 어려운 부분 같아요. 아무리 건축가가 노력해 ‘공간’이라는 ‘상황’을 마련해도 실제론 사람들이 그곳에서 편안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요샌 이런 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집 밖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편안한 장소는 어디인가? 그런데 그런 공간이 도시엔 거의 없는 거예요.
용주/ 스타벅스 같은 커피숍이 현대인에겐 그런 공간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두진/ 그렇죠. 하지만 거긴 재화의 교환을 전제로 하는 곳이잖아요. 사실 한 끼 식사분을 내야 하죠. 요새 그런 것에 관심을 두다 보니 실제로 집 앞 공원에 가서도 사람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주의 깊게 살피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생각보다 책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아 놀랐어요.
용주/ 그렇죠. 요새는.
두진/ 네. 해외 출장을 가보면 공원에서 편안히 책을 보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데 한국은 좀 다르더라고요. 서울의 공원에선 사람들이 대부분 열심히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아니면 햇빛을 피해 텐트를 쳐놓고 누워 있죠. 그냥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이 좀 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용주/ ‘느슨한 시간’을 편안히 즐기는 사람이 줄어든 것 같긴 해요. 공원에 멍하니 앉아 있거나, 햇빛을 쐬며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거의 못 본 것 같아요.
두진/ 제가 왜 이런 얘길 하느냐 하면 최근 이 도시에서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두 가지 중 하나가 공원이기 때문이에요. 다른 하나는 1960~1970년대에 지은 상가형 아파트들이고요. 사실 이 둘은 상보적이거든요. 이쪽(과거 아파트)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그 복잡함을 상쇄할 또 다른 게 있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근래엔 사람들이 공원에서 무얼 하는지에 관심이 많아요.
용주/ 그래서 공원에 자주 가세요?
두진/ 네. 사무실 바로 옆에 있는 공원에 자주 가요. ‘통의동 마을마당’이란 곳이죠. 그곳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어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요새 제가 거기에서 유심히 보는 건 나무나 꽃 같은 게 아니에요.
용주/ 그럼 뭘 보세요?
두진/ 사람들이 거기에 버리는 쓰레기를 관찰하죠.
용주/ 그걸 왜 보세요?(웃음)
두진/ 사실 그 공원이 지난해에 국유지에서 사유지로 넘어가 현재 지자체의 관리가 안 되고 있거든요. 저를 포함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관리하는 중이죠. 그건 그렇고, 제가 쓰레기를 관찰하는 건 어떤 ‘이야기’ 때문이에요. 처음엔 그냥 버려진 쓰레기를 치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걸 보며 어떤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걸 버린 이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기분으로 여기에 와 있었을까 하는 상상요. 실제로 공원에서 쉬다 버린 게 아닌, 일부러 찾아와 버린 것 같은 쓰레기도 아주 많아요. 말하자면 ‘시스템화된 쓰레기’죠.
용주/ 이런 쓰레기는 정말 아니지 싶은 것도 있나요?
두진/ 똥요.
용주/ 강아지 똥 같은 거요?
두진/ 아니요, 사람 똥. 그걸 사실 몇 번이나 치워봤어요.
용주/ 하하하.
두진/ 아무튼 전 요새 그게 무엇이든 일단은 좀 들여다보자, 상상력을 발휘하고 판단은 나중에 하자, 아니 판단은 꼭 해야 할 때에만 하자, 사실 판단 없이 그냥 넘어가는 일도 많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살고 있어요. 세상엔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일이 정말 많잖아요.
용주/ 결국 집 근처의 그 공원에서 손을 뗐다는 이야기로 끝날 줄 알았어요.
두진/ 아니, 그건 양보할 수 없는 선이죠. 일례로 지금 동물의 생존과 생명권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용주/ 맞아요.
두진/ 당연히 인간 못지않게 동물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공원도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그런 건 아닌 세상이 됐으니까요. 크든 작든 공원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가까이 있을수록 소중한 것이죠.
용주/ 그건 그래요.
두진/ 이런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텐데, 자신의 집이나 직장 주변의 공원을 하나 정해놓고 그곳을 며칠, 몇 달, 1년씩 매일 관찰하며 무슨 꽃이 피었는지 사진도 찍고, 그것에 대해 글을 써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도시를 대상으로 그런 관찰의 기록이 많아지면 흥미롭겠다고요.

나만의 공원 2
두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경우 도심에 자리했음에도 여유 있는 외부 공간을 갖추고 있잖아요. 요즘처럼 날씨가 좋으면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쉬기도 할 거고요. 혹시 미술관에 있는 동안 ‘아, 저 사람들이 정말 릴랙스한 상태에서 공간을 쓰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나요?
용주/ 아이와 함께 온 젊은 엄마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물론 다들 그런 건 아니죠. 그냥 느슨한 것에 불안을 느끼는 이들도 있어요. 아이에게 더 값진 경험을 주고 싶어서 자꾸 뭔가 하려고 하는 경우죠.
두진/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뭐 하나는 가르치고 가야겠다, 이런 건가요?(웃음)
용주/ 네. 하지만 이미 그들은 미술관에 와 있는 거잖아요. 이리저리 다니다 결국 평온을 찾죠. 그런 이들은 ‘여긴 미술관이고, 난 오늘 아이를 데리고 미술관에 왔어’ 하면서 어떤 심리적 위안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냥 단순히 소비되는 ‘휴식’이 아니라 자신과 아이가 공인된 문화 공간에서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에 1차적 평온을 느끼고, 그다음엔 실제로 미술관 마당에서 햇빛을 맞으며 2차적 평온을 얻는 거죠.
두진/ 그걸 보며 뭘 느끼셨어요?
용주/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어떤 이들에겐 강박관념까지 해결해주는구나 싶었죠.(웃음)
두진/ 그 얘길 듣고 문득 생각한 건데, 누가 지금 당장 공원을 디자인하라고 하면 벤치가 아닌 리클라이너 의자 같은 걸 여러 개 둘 것 같아요. 선탠도 할 수 있는 낮은 높이에 고정형이 아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걸로요. 그러면 공원 안에서 사람들이 자리 이동도 하고, 그늘로 옮겨 낮잠도 잘 수 있겠죠. 이건 사실 ‘하드웨어’에 대한 얘기는 아니에요. 정서적으로 부드럽고 융통성 있는 ‘어떤 공간’의 개념이죠. 사실 공원이라고 해서 너무 조경에만 공을 들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대신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하죠. 이런 게 제겐 상당히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용주/ 얘길 하다 보니 ‘소통’과 ‘공간’이란 것도 별것 아니구나 싶어요.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편안한 휴식을 줄 수 있는 것이 ‘공간’이고 ‘소통’이죠. 그런 곳이라면 그곳에서만 지키는 ‘예의’ 같은 것도 생겨날테고요. 도심에서 공원이 아닌 어떤 곳에서 또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요?
두진/ 저는 사람들에게 가능하면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일을 해보라고 얘기해요. 맨날 가는 데만 가지 말고, 낯선 곳에 가서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시작’하라고요.
용주/ 그거 재미있는데요? 낯선 곳에서 접하는 일상.
두진/ 제가 요즘 공원에서 깨닫는 게 바로 그런 거거든요.(웃음) 아주 일상적인 공간에서 이전에 해보지 않은 일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죠.


 

황두진
서울과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재미 건축가 김태수 문하에서 7년간 일했다. 2000년에 독립해 독자적인 작업을 시작했으며, 현재 ‘황두진건축사사무소’를 이끌고 있다.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상(공동 수상)과 서울특별시건축상(2012·2015년) 등을 수상했고, <무지개떡 건축>,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등의 책을 펴냈다.

김용주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간 디자인을 전공하고, 국립민속박물관과 미국 보스턴 피보디 에섹스 뮤지엄에서 전시 디자이너로 일했다.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최초의 공간 전문 전시 디자이너로 기용된 후 국내외의 주요 디자인상을 9개 이상 수상했다. 관람객이 능동적으로 돌아다니며 전시관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디자인을 지향한다.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사진 김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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