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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17 FEATURE

거대담론의 어떤 사잇길

  • 2017-03-26

“최선을 다하지 않고서는 배불리 빵을 먹을 수 없다.” 17세기의 답변이 아니다.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이상남 작가는 현대미술의 생명은 스마트함이고,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절실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빵을 언급하며 강조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고의 경쟁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 예술가의 진실한 생존 방식은 무엇일까?



삼청동길에서 총리관저를 끼고 80m가량 가벼운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오른쪽에 화이트 컬러의 미니멀한 건축이 인상적인 PKM갤러리가 보인다. 갤러리가 청담동에서 이곳으로 이전한 지 올해로 2년째. 삼청동 일대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에선 지난 2년 동안 코디 최, 배영환, 김지원, 백현진, 카르스텐 횔러, 토비 지글러, 이불, 존 발데사리 등 관람객의 발걸음을 사로잡는 주요 전시가 이어졌고 갤러리에 근사한 잔디 정원 카페까지 조성해 더더욱 관객이 줄을 이었다. 제49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로 활동한 박경미 대표가 2001년 화동에 문을 연 PKM갤러리는 2008년 ‘PKM트리니티갤러리’라는 이름으로 강남에 미술 르네상스 시대를 열고자 청담동으로 진출했다. 그 때 야심차게 준비한 개관전이 바로 이상남 작가의 <풍경의 알고리듬(Landscape Algorithm)>. 작가가 자신만의 독창적 아이콘을 조합해 재구성한 복잡한 형상이 모인 추상적 풍경은 세계 3대 미술 전문지로 꼽히는 <아트 인 아메리카>, <아트 포럼>, <플래시 아트>에서 호평을 이끌어냈다.
다시 2015년에 삼청동으로 이전한 PKM갤러리는 한 달 전 본관 옆에 별관 ‘PKM+’를 오픈했고, 개관전으로 또다시 이상남 작가를 선택했다. 2월 20일 개막한 ‘네 번 접은 풍경’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에서는 이상남 작가의 1980~1990년대 초기작과 2012년 이후 제작한 신작을 모두 망라했다. 국내 최고 갤러리 중 하나인 PKM갤러리가 이전 개관전, 그리고 별관 개관전에 두 번이나 이상남 작가를 초대한 건 작가가 그만큼 작업에 대한 성실성을 꾸준히 보여줬다는 의미. 좋은 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많은 작품 중 보석 같은 작품을 골라야 하는데, 작가가 평소 꾸준히 작업해놓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체계적이고 탄탄한 전시를 만들어야 하는 큐레이터나 갤러리스트 입장에서 자기 철학이 확고하고 성실성까지 겸비한 작가를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이상남 작가는 캔버스에 물감층을 입힌 후 사포로 갈아내는 과정을 50~100회 정도 반복, 극도로 매끄럽고 균일한 표면 위에 창조한 기하학적 아이콘을 통해 회화와 디자인, 건축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다. ‘건축적 회화’, ‘건축적 평면’, ‘설치적 회화’와 같이 스케일을 넘나드는 회화를 선보이는 그는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작가로 활동하던 중 스물여덟 살이 된 1981년, 뉴욕으로 건너가 현재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 중이다. 전업 작가라면 작업에 늘 온 힘을 바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침 9시면 스튜디오로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다시 다음 날의 작업을 위해 휴식을 취하며 틈틈이 산책으로 몸 관리를 할 정도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작가라면 가까이할 만한 술과 담배는 물론, 일과 관련되지 않은 사사로운 약속도 멀리하고 늘 작업 시간 확보와 체력 관리를 최우선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업에 대한 집중도가 높다. 뉴욕과 암스테르담, 밴쿠버, 도쿄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하고 아머리쇼와 세비야 비엔날레, 아트 바젤,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에 참여하며 세계적 작가로 이름을 알려온 그는 갤러리스트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학습하고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작가로 정평이 나 있다. 경기도미술관 로비, 폴란드 포즈난 신공항 로비, 도쿄 주일 한국대사관 신청사 등의 대규모 천장화 작업을 통해 대중과도 밀접하게 소통하는 그가 PKM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위해 내한했다. 인터뷰에 앞서 작품을 찬찬히 둘러보는 취재진을 유심히 보던 그가 묻는다. “지금 작품을 보고 있는 기자님을 제가 보고 있고, 그런 제 모습을 갤러리 직원이 보고 있고, 그걸 다시 관람객이 보고 있고. 재미있지 않나요? 우리는 과연 뭘 보고 있는 걸까요?”











폴란드 포즈난 공항에 설치한 작품, Mediations Biennale-Poznan Landscapic Algorithm, Acrylic Urethane on Aluminum panel, 7,375 X 300cm, 2012, Poznan Airport

2008년에 PKM의 청담동 이전 개관 전시로 개인전을 하셨는데 이번에도 PKM 별관 오픈 전시의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감회가 어떤가요? 좋은 갤러리를 만나는 건 작가에게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 입장에서는 갤러리를 믿고 따를 수 있으니까요. 처음에 뉴욕으로 터전을 옮긴 후 16년 만인 1997년에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도 반응이 좋았는데, 2008년 PKM트리니티갤러리 오픈 개인전도 성공적이었어요. 나는 작품이 늘 충분한 편이니까 갤러리스트들이 직접 맘에 드는 걸 골라 전시를 꾸밀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이번 개인전은 2012년 이후 제작한 신작으로 본관을, 1980~1990년의 초기작으로 별관을 꾸몄습니다. 완전히 별개의 건물인 데다 작품시기도 떨어져 있는데 단절된 느낌이 크게 들진 않네요. 최대한 연결되어 보이도록 노력했거든요. 굳이 내 작품을 구작과 신작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싫어요. 우리는 모든 걸 ‘시간’을 기준으로 보는 것에 훈육되고 길들여졌지만, 사실 그걸 벗어던질 필요가 있어요.

작품에는 선과 원을 조합한 수많은 아이콘이 등장합니다. 원은 삶을, 직선은 죽음을 상징한다고 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죠. 관람객은 아이콘의 집합이 만들어낸 풍경의 해석을 각양각색으로 받아들입니다. 쏟아지는 별, 계단, 우주의 악보, 춤, 이런 식으로요. 저는 풍경을 기호의 그물로 건져낼 뿐이지 언어화하지는 않아요. 제가 작업하고 구축한 아이콘이 600~700개 정도 되는데, 그걸 아이콘 사전이라고 불러요. 그림은 보는 것이지 읽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작품을 자꾸 언어화하려고 합니다. 미술이 언어의 기능으로 작용하는 건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에요.

추상미술은 그런 의미에서 관람객의 해석이 곧 작품의 시작이 될 수도 있겠군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당신의 해석은 내 의도와 다르다’가 아니라 ‘당신의 언어가 내 작품의 시작이다’ 이렇게요.

이번 전시 작품에서도 아이콘의 무수한 집합이 보입니다. 한 작품에 보통 몇 종류의 아이콘을 활용하시나요? 매번 달라요. 아이콘 사전에 저장한 아이콘을 끌어오기도 하고 그걸 다시 버리면서 이미지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 외에 노트에 직접 드로잉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게 제 작업의 힘이에요. 그리고 뉴욕에 오기 전 사진 작업과 설치 작품을 한 것이 지금 회화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런가요? 색을 캔버스에 칠했을 때 그 컬러의 정체성, ‘Itself’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예전 작업의 영향이라고 봐요. 여러 매체의 그물을 사용해 걸러내다 보니 회화의 새로운 평면, 건축적 평면이 나올 수 있는 것 같아요.

폴란드 포즈난 공항의 설치 작품과 도쿄 한국대사관의 천장화 등을 보면 공간적 회화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교본 같은 느낌이랄까요. 포즈난 공항 프로젝트는 제가 폴란드 미디에이션 비엔날레에 참가하면서 작업한 작품이에요. 당시 비엔날레 장소가 여러 군데였는데, 저에게 공항, 미술관, 도서관 중 한 곳을 선택하라고 해서 공항을 골랐어요. 공항은 익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하거든요.






도쿄 한국대사관 설치 작품, Landscapic Algorithm(Light + Right), Acrylic urethane on Aluminum panel, 1,132 x 442.3cm, 1,134 x 649.2cm, 2013, Korean Embassy in Japan

유럽의 공항에 한국 작가의 작품이 영구 설치되는 건 웬만한 행운이 따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로 보여요. 2012년 당시 그곳에 신공항을 지었는데 비엔날레도 마침 그 장소에서 같이 열기로 결정한 거죠. 저로서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새로 문을 여는 공항에 대형 작품을 설치하게 되었으니까요.

당시 한국 매스컴을 통해 선생님 소식을 들은 것이 기억납니다. 건축가와도 교류가 이루어졌나요? 네, 설계 도면을 함께 보며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죠. 무엇보다 저는 건축가가 ‘버려진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곳을 새롭게 해석해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다음 해에 진행한 주일 한국대사관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였죠.

1979년에 설립한 한국대사관 청사를 2013년에 새롭게 건축하는 과정에서 합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진행한 프로젝트였나요? 당시 신각수 대사님께서 “청사를 미술관 형식으로 만들겠다”며 작가 몇 명을 초대했어요. 프로젝트 담당 큐레이터가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해 걸겠다고 했는데, 저는 그 공간을 한 번 보고 “제 작품은 사서 걸지 말고 공간을 활용한 프로젝트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죠. 처음엔 놀라는 듯했지만 일이 진행되면서 굉장히 협조적이었습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 대사관 측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왔다는 것이 매우 놀랍네요. 한 사람의 맑은 눈이 없으면 그런 프로젝트는 이루어지지 않죠. 신각수 전 주일 대사가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기하학적이면서도 한국 전통미를 느끼게 하는 아이콘을 이용해 궁궐 천장의 장식미술과 하늘의 별자리를 형상화한 그 작품은 크기가 가로 11m, 세로 4~6m에 달합니다. 여러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겠죠? 물론 전문 기술자들이 많이 도와줬습니다. 특히 7층 높이에 작품을 설치하려면 비계(飛階, 건물을 지을 때 외벽에 계단을 설치해 인부들이 다닐 수 있게 만들어놓는 것)를 7층 높이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런 부대 장비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죠.

부담이 크셨겠어요. 작품 때문에 건축 공정도 늦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교포들까지 십시일반 기금을 마련해주셨거든요. 작품 설치 과정이 복잡하다 보니 일본 사람들은 책임지기 싫은 마음에 손을 떼고, 그래서 한국 기술진 7명이 함께 했어요. 작품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아 모두 도르래를 이용해 올렸죠. 그때는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다 부러웠어요. 모두들 하나같이 걱정 없는 표정으로 보였거든요.

‘그냥 기존에 작업한 작품을 줄걸’ 하는 생각도 들었겠어요. 후회는 없었어요. 2010년에 진행한 경기도미술관 작업도 마찬가지였어요. 미술관에 설치할 작품을 구입하겠다며 연락을 주셨는데, 제가 “직접 설치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했거든요. 제 말에 미술관 큐레이터들이 모여 긴급 회의를 했고, 승인이 났죠. 당시 김홍희 관장님은 걱정이 많으셨어요. 진행하라고 허락은 했는데 과연 어떤 설치 작품이 나올 줄 몰랐으니까요. 근데 그것도 반응이 좋았어요. 경기도미술관 로비에 영구 전시되어 있으니 언제 한번 가서 보세요.

그런 건축적·공간적 회화는 건축에 대한 선생님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건가요? 어릴 적부터 건축, 특히 구조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건축이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 제가 현대미술로 해결하는 그 과정이 정말 재미있어요. 건축가들이 버린 공간, 폐기한 것을 주워 탁탁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랄까요.






현재 PKM 갤러리 본관에서 만나볼 수 있는 신작, 4-Fold Landscape L 128, Acrylic on Panel, 152.5 x 183.5cm, 2015

갤러리 전시는 그에 비하면 협소하게 느껴질 수 있겠네요. 관람객과 소통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른 방식을 택해야 할 것 같고요. 사실 PKM갤러리 본관은 아주 센 공간이에요. 작품이 힘이 없으면 버티기 어렵죠. 저는 이번에 본관과 별관을 수평적으로 연결해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초기작과 최근작, 이렇게 수직적으로 나누기보다 그 풍경들이 투명하게 중첩되고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요. ‘4번 접은 풍경’이라는 제목도 그런 의도로 정한 겁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두고 디자인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반응도 재미있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low, high가 따로 있나요? 대중가요는 낮고 클래식은 높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너무 천편일률적으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따라 나누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수직적 사고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특히 무의식중에 우리는 말 되는 것, 즉 고착된 것만 찾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말 되지 않는 것을 지속적으로 파고들 때 말 되는 게 나올 수 있거든요. 그 과정에서 새로운 충격, 신선한 낯섦을 발견하면서 창의적인 어떤 것이 나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제 작품은 건축과 회화의 사잇길, 디자인과 회화의 사잇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요즘 한국 사회에는 예전에 50대 부장이 하던 행동을 대학의 3~4학년 선배, 회사의 대리급 직원이 한다고 해서 ‘젊은 꼰대’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 정도로 젊은 세대조차 고착화된 악습을 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은 유연한 시각과 사고를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살아온 도시의 영향이 크겠죠? 아무래도요. 특히 뉴욕은 뭐든 가능한 도시죠. 코끼리 똥 가지고도 예술을 하는 도시니까요.

1980년대에 뉴욕에 정착하면서 당시 한국의 상황과 가장 다르다고 생각한 건 무엇이었나요? 단적인 예로 1970년대 후반에 뉴욕에선 이미 ‘노스모킹’ 운동이 한창이었어요. 흡연자를 원시인 보듯 했죠. 예술가도 그랬어요. 유명 예술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즈니스맨 같은 모습으로 다녔어요. 대표적으로 앤디 워홀을 떠올리면 돼요. 냉철하고 자기 관리가 똑 부러지는 스마트한 작가들이 당시 주류 미술계를 이끌었고, 지금껏 살아남았죠.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다 보니 저도 그렇게 변하게 되더라고요. 무엇보다 당시 뉴욕에선 독일 표현주의가 유행했어요. 저는 서울에서 미니멀리즘과 컨셉추얼 아트에 경도되어 있는 상태였죠. 그것이 전부라고 믿었을 만큼. 그런데 뉴욕에서 그게 완전히 부서졌어요. 다시 물감을 사용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1 PKM+에 전시 중인 이상남 작가의 초기작
2 이상남 작가가 창조한 아이콘들은 약 600여개에 이른다. 그 아이콘들을 재조합하고 재구성해 완성한 그의 신작, 4-fold landscape L 138, Acrylic on panel, 203.5 x 162.5cm, 2016~2017

사진이나 설치 같은 쿨한 매체를 활용하다 다시 물감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전 페인팅이 굉장히 보수적이고 진부하고 구닥다리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렇지만 뉴욕에서 제대로 내 작업을 하기 위해선 다시 붓을 들어야 한다고 판단했죠. 결과적으로 그래서 지금의 제가 존재하는 것이니 그런 점에서도 저는 굉장히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뉴욕에 갔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 거니까요.

현대미술의 심장부인 뉴욕에서 작가로 사는 건 어떤가요? 끊임없는 경쟁과 긴장의 연속이라고 보면 돼요. 뉴욕에 정착한 초반엔 일주일내내 작품 앞에만 앉아 있었어요. 밥 먹고 작업하고 자고, 다시 밥 먹고 작업하고 자고. 그렇게 살았죠. 하루는 친구가 그런 날 보더니 “하나님도 하루를 쉬는데 네가 뭔데 7일을 일하느냐”고 하더라고요. 당시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어요. ‘아, 내가 작가로서 지치지 않고 즐겁게 오래 일하려면 이 방법으로는 안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하루에 8시간 일하는 체계로 바꾸었어요. 9시 출근, 6시 퇴근 체계요. 하루에 1시간은 꼭 산책을 하고, 저녁이면 다음 날의 작업을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전업 작가라면 자기 관리가 필수라고 생각해요. 건강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몸을 잘 만들어놓아야 하죠.

작업을 건강하게, 오래 하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일 수 있겠네요. 일에서만큼은 디테일하고 0.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편이지만 일상은 매우 심플해요. 작업을 위해 심플하게 사는 거죠. 솔직히 30대부터 지금껏 30년 넘게 스튜디오에 있었던 기억밖에 안 나요. 동년배들이 즐기는 삶을 기준으로 본다면 저는 놓친 것이 많죠. 그런데 저는 제가 작가로 살면서 뚜렷한 작품 형식을 적어도 3개는 만들고 싶어요. 언젠가 미술관에서 그 형식을 총망라한 전시를 해보고 싶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해요. 그리고 저는 작품을 하는 작가도 중요하지만 그걸 보러 오는 관람객의 입장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는 작가의 본분을 기억하고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합니다.

미술계에서 선생님을 왜 ‘바른 생활 사나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내가 가진 에너지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요. 사람이 가진 에너지의 양은 각각 다르지만 한계는 분명 존재하잖아요. 그걸 어떻게 분배하고 조절할지 늘 신경 써야 하죠.

많은 예술가가 예술을 하는 목적이 각각 다릅니다. 선생님의 목적은 뭔가요? 두 가지예요. 첫째는 For Fun! 나 자신에게 재미없는 작업은 관람객에게도 어떠한 매력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빵! 작품을 빵과 바꿀 수 있다는 건 내 작업이 바로 생존이고 절실함이란 의미죠.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김제원  취재 협조 PKM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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