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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16 SPECIAL

‘디자이너’라는 역할 모델

  • 2016-02-29

미술계를 구성하는 또 다른 일원인 디자이너의 역할이 점차 확대, 변화하고 있다. 그들은 더는 작가의 훌륭한 조력자에 머물지 않는다. 전시 기획부터 도록 완성까지, 모든 영역에 깊숙이 개입하며 제3의 창작 집단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2016 세마 블루-서울 바벨>전 포스터.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 섹션에 참여한 햇빛스튜디오(박지성, 박철희)가 제작했다. 햇빛스튜디오는 이태원에 ‘햇빛서점’을 운영 중이다.




2011년 워커아트센터에서 열린 그래픽 디자인 전시 < Graphic Design: Now in Production > 도록. 2000년 이후 전 세계에서 발행한 잡지, 신문, 책과 포스터 등 각종 그래픽 디자인 작업을 망라했다.




<2016 세마 블루-서울 바벨>전 전경 / ⓒ Seoul Museum of Art, Jo Jaemoo




슬기와 민, 치홀트 되기, 2014_ <글짜씨> 10호의 얀 치홀트 특집을 위한 작업 / ?ⓒ Sulki & Min




슬기와 민, 테크니컬 드로잉, 2014_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출품작 / ??ⓒ Sulki & Min

서울시립미술관에서 4월 5일까지 열리는 <2016 세마 블루-서울 바벨>(이하 <서울 바벨>)은 한국 미술계에서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젊은 창작자 70여 명을 한 전시장에 모은 기념비적 전시다. ‘예술 플랫폼’이라 명명한 17팀에 소속된 이들의 직종은 작가, 디자이너, 기획자 등을 모두 아우른다. <서울 바벨>전의 한 섹션에는 ‘디자인과 동시대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인 모조산업, 오와이이, 워크스, 햇빛스튜디오 등이 초대됐다. 전시를 기획한 신은진 큐레이터는 신생 미술 팀과 그들이 운영하는 공간에 관한 전시에 디자인 스튜디오를 초청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 문을 연 신생 플랫폼은 물리적 공간보다 온라인이나 SNS 등의 매체를 활용해 자신의 활동을 홍보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정방형의 납작한 로고를 만들어주는 이들이 디자이너 아닌가. 이제 작가와 디자이너는 갑을 관계가 아니라, 그 출발점에서 파트너로 함께하고 있다.” 신 큐레이터는 해당 스튜디오를 이끄는 디자이너들의 공통점으로 ‘기획력’을 꼽았다. “전시에 참여한 워크스는 <과자전>을 개최하고, 햇빛스튜디오는 ‘햇빛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 디자이너의 역할은 인쇄 매체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문화 예술 지형도에 존재하지 않는 역할을 찾고, 그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창작 행위를 기획하고 생산하는 단계로 확장해가는 중이다.”
작년 하반기부터 서울에서는 디자이너의 위상(?) 변화와 그에 따라 발생한 문제적 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작지만 중요한 미술-디자인 이벤트가 이어졌다. 그 흐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계간지 <그래픽> 34호가 ‘엑스트라 스몰: 영 스튜디오 컬렉션(XS: Young Studio Collection)’을 주제로 출간됐다. 여기에 참여하거나 소개된 디자인 스튜디오 44팀의 작업 결과물을 모은 아카이브형 전시가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탈영역 우정국’에서 10월 한 달 동안 열렸다. 주최 측은 “그래픽 디자인이 예술을 위한, 문화를 위한, 사회 참여를 위한, 자아 실현을 위한, 여흥을 위한 도구이자 무기로 변모, 확장되고 있다”면서, 이 전시가 “그래픽 디자이너는 더 이상 과거의 그래픽 디자이너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전시 보도자료는 일종의 선언문처럼 보였다. 10월 중순에는 세종문화회관 예술동에서 신생 미술 공간 15곳과 젊은 작가 80여 명이 힘을 합쳐 각 작품을 상품처럼 판매, 전시한 ‘굿-즈’가 열려 큰 화제를 모았다. 이 열기를 이어받아 11월에는 독립 출판 행사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 7회가 일민미술관에서 성대하게 막을 올렸다. 장소를 여기저기 옮기며 열리던 소규모 행사의 미술관 입성도 나름 화제였지만, 부대 행사로 열린 ‘포스터 온리’는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이끌어냈다. 주최 측은 ‘포스터 온리’가 “국내외의 창작자 40여 명이 만든 포스터만 판매하는 시장”이며 “개인의 미적 직관이나 취향이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포스터 온리’에 참여한 ‘창작자 40여 명’은 대부분 ‘그래픽 디자인’ 영역에 속해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그래픽> 34호와 탈영역 우정국 전시는 물론 지난 1월부터 열린 <서울 바벨>전에도 참여하고 있다.
기획 의도나 성격이 각기 다른 이들 이벤트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젊은 창작자들의 동물적 생존 본능과 그 정반대의 위치에서 주류에 편입하길 거부하고 뜻이 통하는 동지를 만나 아이디어를 실천하려는 유토피아적 분위기가 그것. 이제 막 학교를 졸업했거나 아직도 20대인 그들은 실체 없는 불안과 열망 사이를 오가며, 굳이 ‘디자이너’라는 직함에 자신을 카테고리화하지 않는다. 나와 함께할 친구를 장르 구분 없이 열심히 찾고, 그들과 전시나 공연을 기획하고, 잡지·포스터·음반 따위를 만들고, 가방·엽서·공책 등의 귀여운 문구 상품을 제작하고, 이 모든 것을 파는 데 주저함 없이 적극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활동의 배후에 ‘디자인’이라는 분야의 광의적 맥락과 ‘디자인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주체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편 그들은 디자인 세계에 적절히 몸을 숨길 줄 아는 영악함도 내비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그들을 ‘누구’라 불러야 할까? 작가? 창작자? 작가-디자이너? 디자이너-작가? 디자인-미술-창작자? 그들의 직업을 무엇이라 부르든, 그 캐릭터는 점점 유형화되는 추세다.
디자이너가 제 역할을 (기획자로든, 작가로든) 확대, 갱신하며 작품 활동을 펼치는 것은 사실 그리 낯설지 않다. 오는 3월 말,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은 그 역사적 맥락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미술관의 홍보 자료에 따르면, 이 전시에서는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의 역사를 개괄하고 주요 작품을 소개한다. 지난 10년간 서울에서 발표한 101점의 빛나는 그래픽 디자인 작품을 선별하고, 이를 11팀이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꾸릴 예정이다. 11팀에는 그래픽 디자이너를 비롯해 미술·디자인 평론가, 디자인 잡지 편집장, 사진가 등 폭넓은 영역의 전문가가 선정됐다. 무엇보다 이 전시가 특별한 기대를 모으는 이유는 기획자들의 남다른 포지셔닝 때문이다. 역시 소규모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김형진(워크룸)과 최성민(슬기와 민)이 그 주인공. 이들은 앞서 언급한 미술-디자인 이벤트에 참여한 20~30대 디자이너들의 선배 세대이자 실제로 학교에서 그들을 가르친 스승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현재 국내에서 일고 있는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와 출판사, ‘작가-디자이너’라는 역할 모델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말이다. (워크룸 프레스와 슬기와 민의 스펙터프레스는 ‘작업실유령’이라는 임프린트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한편 전시 구성의 출발점인 2005년은 최성민이 최슬기와 해외 활동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워크룸은 2006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전시는 김형진과 최성민 세대의 시각에서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한 챕터를 정리하는 셈이다.)




디자이너 김형재가 속한 O/R이 <즐거운 나의 집>전에 출품한 ‘확률 가족’ 전경. 온갖 통계 지수를 바탕으로 제작한 인포그래픽 전시장에서 관람객은 자신의 재정능력에 따라 경제적 주거 여건을 추산해볼 수 있었다.




제7회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공식 포스터(디자인 박선경). 국내 최대 규모의 독립 출판 행사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다.




워크룸 프레스에서 발행한 박해천의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표지.




워크스에서 기획한 행사 ‘과자전’ 포스터. ‘과자전’은 과자를 좋아하거나 만드는 사람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이벤트로 6회까지 개최했다.




워크스에서 제작한 토트백.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워크스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스 서비스와 작업물을 판매하는 공간 워크스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앞으로’(이경민, 이도진)에서 제작한 게이 잡지 <뒤로>의 표지

워크룸이 출판사의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슬기와 민은 디자인을 기본으로 한 ‘작가’라는 ‘캐릭터’가 강하다. 이 듀오의 존재는 미술과 디자인 양쪽에서 바라봐도 이례적이다. 그것은 그들이 10여 년간 유지한, 디자이너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는 한국 문화 예술계의 선입견을 부수는 급진적 태도와 발언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우선 디자이너로서 그들이 미술계에 발표한 작업을 살피면 한국 동시대 미술을 개괄하는 기분이 든다. 플라토, 아르코미술관, 일민미술관, 문화역서울284, 국제갤러리, 아시아예술극장 등에서 열린 국내외 작가들의 크고 작은 개인전과 기획전을 포함해 페스티벌봄, 광주비엔날레,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등의 굵직한 미술 이벤트가 ‘디자이너’인 그들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대부분의 프로젝트에 안소연, 김성희, 김성원 큐레이터의 이름이 올라 있다). 슬기와 민은 2011년 BMW와 구겐하임 미술관이 공동 진행한 프로젝트 ‘BMW Guggenheim Lab’의 로고 디자인을 맡으면서 디자이너로서 국제적 명성도 얻었다. 작가로서의 활동도 독보적이다. 이들은 개인전 개최 외에도 2010년부터 작가 박미나, Sasa[44]와 함께 SMSM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고, 2014년에는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의 최종 후보 3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는 처음이었다. ‘테크니컬 드로잉’이라 명명한 출품작은 미술을 좀 안다는 이들도 독해하기 까다로운 환영과 재현의 오랜 문제에 블랙유머를 곁들여 오늘의 관점에서 고찰했다.
‘뭐든지 거절하지 않는다’를 모토로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바쁜 디자이너로 통하는 듀오 김형재×홍은주도 주목할 만하다. 2007년부터 듀오로 함께 스튜디오를 운영 중인 이들은 블로그를 통해 예약제로 주문 판매한 <가짜잡지>를 만들면서 활동 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다. 듀오로 제작한 미술 관련 출판물도 멋지지만, 김형재의 솔로 활동은 유일무이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김형재는 <가짜잡지> 이후에 2011년부터 <도미노> 편집 동인으로, 2013년부터 영등포에 있던 커먼센터의 운영위원으로 활약했으며, 2013년부터 부동산 전문가 박재현, 도시 연구가 최봉준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O/R(옵티컬레이스)을 만들어 도시와 교통 인프라, 부동산 등을 연구, 조사해 관련 자료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지금은 주로 박재현과 듀오로 활동 중이다). 이들은 일민시각문화총서 시리즈 <공원, 한강, 이득영>을 시작으로 2014년 안양 공공 예술 프로젝트 ‘세 도시 이야기’로 전시에 참여하고 동명의 책을 출간했다.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즐거운 나의 집>전에 출품한 ‘확률 가족’은 SNS를 중심으로 전시보다 더 큰 화제를 모았으며, 이 작품을 토대로 한 동명의 단행본은 베스트셀러로 판매 중이다. 김형재는 O/R로 한국 신진 작가를 지원하기 위해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2년마다 개최하는 ‘아트스펙트럼’의 참여 작가로 선정됐다. 일민미술관의 함영준 디렉터는 그의 전방위적 활동을 ‘기획자-디자이너’라는 맥락에서 요약해 설명하면서, “그것은 디자인의 범위를 확장하면서, 한 전시의 콘텐츠 전반에 깊은 영향을 주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언급한 신은진 큐레이터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서울 바벨>전으로 돌아가보자. 신생 예술 플랫폼의 다채로운 캐릭터를 드러내듯 무지개 그러데이션으로 뒤덮인 전시 도록에는 전시에 참여한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미술과 그래픽 디자인의 경계는 더없이 모호해졌지만, 그럴수록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그들의 거점을 매개로 독립-디자이너로서의 독특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이들은 내밀한 사적 욕망을 실현하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이를 빠르게 소진시킴으로써 스스로 디자인의 공간을 확장한다.” 확장된 디자인 공간에서 그들이 누릴 자유와 그에 따른 무한 경쟁이 어떤 장면으로 귀결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2016년 이후 한국에서 미술과 디자인의 같고 다름을 문제 삼는 일은 여전히 중요할까? 섣부르게 미래를 예측하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조건 속에서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를 몇 가지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중 하나는 달라진 디자이너의 역할과 활동에는 디자인을 포함해 동시대 미술의 작품 생산과 전시, 판매로 이어지는 기존의 방법론이 본질적으로 변하는 중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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