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창의 결정적 순간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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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24

구본창의 결정적 순간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말굽자석을 앞에 갖다 놓고 공명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한쪽을 두드리면 다른 한쪽이 공명을 일으키며 웅웅 소리를 반복하던 2개의 말굽자석, 그때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의 바람도 결국 그런 사진적인 공명이다. 나는 내가 찍은 사물과의 교감이 일종의 에너지처럼 필름 속에 스며든다고 믿는다.” - 구본창의 <공명의 시간을 담다> 프롤로그 중에서

구본창(1953년 서울 출생) 현재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교수, 박건희문화재단 이사장 2014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구본창의 아카이브: 18개의 전시> 2011년 서울, 국제갤러리, 2010년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 미술관, 2008년 ‘2008 대구사진비엔날레’ 전시총감독 2007년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개관 기념전, <구본창>전 2006년 서울, 국제갤러리, <백자> 1999년 런던 세인트 마틴 스쿨 초청교수 1980~1985년 함부르크 국립조형미술대학교 사진디자인 전공, 디플롬 1971~1975년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과 졸업 www.bckoo.com

“두바이에서 지난주 월요일에 돌아왔어요. 두바이 옆 도시 샤르자의 미술관에서 열린 그룹 사진전에 제 작품을 전시했거든요. 샤르자 비엔날레는 익히 들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미술관에서 사진 작품만 소개하는 전시는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요르단, 이란, 인도, 인도네시아 작가가 다양하게 참여했는데, 각 나라의 정서를 각 작가의 시선으로 해석한 점이 독특했어요.” 전시 오프닝에는 아부다비와 두바이의 로열패밀리가 참석했고, 그들과 나란히 서 있는 구본창 작가의 사진은 샤르자 신문 1면에 큼지막하게 실려 아랍에미리트 전역에 뿌려졌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6월, 분당의 한적한 작업실에서 만난 구본창 작가는 샤르자 여행의 감흥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그곳에서 가져온 맛난 간식거리와 함께 뒷골목에서 건진 전리품을 쑥스러운 듯 꺼내놓았다. “이 빠진 도자기, 우리네 곱돌과 비슷한 재료의 투박한 등잔, 민화를 새긴 쓰레받기… 모두 샤르자에서 사온 것이에요. 특히 이 쓰레받기는 한 가게에서 사용하는 걸 보고 주인을 끌고 쓰레받기를 파는 곳까지 같이 가서 사온 거예요. 제가 그런 걸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거든요. 가방에 여유 공간이 있었으면 더 샀을 텐데 너무 아쉬워요.” 구본창의 작업실이 만물상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앤티크 컬렉터라 불러도 될 만큼 작업실 곳곳에 낡은 물건이 가득했다. 오죽하면 2011년엔 어린 시절부터 모은 수집품을 개인전에서 함께 선보였을까! 거뭇하게 녹 슨 선풍기와 앉는 순간 폭삭 주저앉을 것 같은 낡은 의자,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다 준 달력과 브로슈어 그리고 온갖 잡지, 얇을 대로 얇아져 휴지통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 듯한 닳아빠진 비누까지, 남들에겐 쓸모없는 물건이고 하찮은 사물이지만 그에게는 수집 대상이고 작품의 모델이 된다. 작가들을 만나보면 어린 시절 흙을 만지며 논 예술가는 자연 재료를 사용하는 경우가, 기계를 가지고 논 작가는 미디어나 영상 예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유년 시절의 감성에 무의식적으로 지배당하는 것.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낡은 것에 집중하고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내는 구본창 작가도 그렇다. 3남 3녀 중 다섯째, 살림 밑천인 누나들과 수재 소리를 듣던 형, 온 가족의 사랑을 먹고 자란 막내 남동생에게까지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뺏긴 채 어릴 때부터 외로움과 친구가 된 그는 더없이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성격으로 자랐다. 형제들이 밖에 나가 뛰어놀 때 그는 양모 수입 회사를 경영하던 아버지가 출장길에 사다 준 잡지나 팸플릿, 달력을 보며 놀았고, 더없이 아름답게 비치던 그것을 하나 둘 모으며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어나갔다. “제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다 모았어요. 열 살 때 수집한 1963년도 달력을 지금도 가지고 있을 정도니까 수집벽이 대단하긴 했죠. 집에 걸었던 달력인데 지금 봐도 디자인이 군더더기 없이 세련됐어요. 집 안에 굴러다니던 양털실도 늘 저에게는 놀잇감이었죠. 그것들을 보고 모으는 재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몰라요.” 사내아이가 방 안에 틀어박혀 이런저런 인쇄물이나 보며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한 아버지에게 그는 늘 핀잔의 대상이었다. 부모의 사랑에 목마른 그는 답답한 마음 한구석을 그것으로 보상받았는데, 거꾸로 부모에겐 그런 아들의 모습이 한없이 답답했다. 그는 수집품을 남이 볼까 꽁꽁 감춰야 했고, 부모 앞에서 늘 위축된 채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이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어요. 늘 뭔가 숨기려 했고 내가 좋아하는 것,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거든요. 창피당할까 봐….” 그럼에도 그는 50년 된 당시 인쇄물을 지금껏 무사히 보존했다. “이사 갈 때마다 매번 야단맞았어요. 이제 그만 버리라고. 근데 지금껏 끌고 다녔으니 저도 참 대단하죠.” 서울고등학교 재학 시절 미대 입학의 꿈을 키웠지만 집에서 그러라고 할 리 없었다. 부모의 뜻에 따라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해서도 예술에 대한 꿈을 접지 못한 그는 미술 동아리 ‘화우회’에 가입해 그림을 그렸고, 클림트나 로트레크의 작품을 모사하거나 교내 연극 포스터 등을 그려주며 미술의 끈을 놓지 않았다. 친구들처럼 졸업 후 그도 자연스럽게 무역 회사에 취직했다. 퇴근 후 1, 2차로 이어지는 회식 자리에 6개월 동안 끌려다니며 그 시대의 조직 생활이라는 걸 경험했다. 지금도 무리 지어 우르르 몰려다니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는 그에게 출근, 야근, 회식으로 이어지는 사회생활은 생지옥이었다. 더 이상 견딜 수도, 감내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 그는 과감히 사표를 내고 독일 함부르크로 떠났다.




1 샤르자의 미술관 전시 오프닝 참석차 샤르자에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사 온 쓰레받기
2 ‘백자’ 시리즈, AAM 010,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 소장, 2011 절제된 아름다움, 무욕의 미학으로 완성한 조선 백자의 내면을 찍기 위해 구본창 작가는 오사카 동양 도자 미술관, 대영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백자들을 찾아가 촬영했다. 사진을 통해 보이는 백자의 살결이 인상적이다.

함부르크에서 발견한 것
1979년부터 1985년까지 6년 동안 함부르크 국립조형미술대학에서 유학한 시절이 없었다면 단언컨대 지금의 구본창 작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구본창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독일 생활에서 얻은 건 사진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만이 아니다. 인생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처음 깨달았고, 사진 과제를 수행하고 교수에게 인정받으며 자신이 비로소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독일 친구들 사이에서 ‘당나귀 구’라고 불렸을 정도로 차도 없이 언제나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다녔지만 20대 후반 그 시절은 누가 뭐래도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행복이 무엇이고 인생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처음 알게 된 건 독일에서였어요. 정신적으로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죠. 하지만 무거운 가방, 쏟아지는 과제 때문에 몸은 늘 피곤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에요.”
며칠 전에도 분당에서 서울 시내로 나가는 길, 버스를 놓칠까 봐 배낭을 멘 채 그는 힘을 다해 뛰었다. “시내로 나갈 때는 길이 막혀서 가능한 한 버스를 이용하는데, 그날은 뛰면서도 ‘지금 내 나이에 버스를 놓칠까 봐 이렇게 뛰는 게 정상인가?’ 생각했어요.(웃음)” 이 정도는 약과다. 샤르자에서 도착한 이틀 뒤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대구에 강의를 다녀왔다. 왕복 7시간에 수업만 8시간. 20~30대도 여간해선 버티기 힘든 스케줄이다. 다른 날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지금껏 국내외 유명 미술관에서 30여 차례 개인전을 열고 60여 차례 단체전에 참여한 그의 이력뿐 아니라 전시 기획과 촬영, 강의까지 가득 잡힌 일정을 볼 때 거의 매일 초인적인 힘으로 살아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가 개성 분이세요. 제가 어릴 때부터 ‘개성 사람은 신용이 있어야 한다.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에만 ‘yes’를 하고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허튼소리를 내뱉지 마라’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듣고 자랐어요. 그런 영향 때문에 제가 맡은 일은 어떻게든 해내며 살아왔고, 지금도 혹 몸이 아프거나 힘들 때면 ‘어떻게든 컨디션이 회복될 것이다’라며 나 자신을 세뇌시키죠.”




1, 2 독일 유학 시절 과제로 촬영한 ‘사과’, 1983 독일 유학 시절 교수들이 수업시간에 가장 강조한 것은 ‘본질에 충실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독 ‘정물’과 ‘자화상’에 관한 훈련을 많이 받았다.

‘당나귀 구’로 살던 함부르크에서도 그랬다. 느지막이 시작한 공부라 남들보다 배로 집중하고 열심해 해야 했다. 다행히 조형과 사진, 디자인을 모두 아우른 독일에서의 수업은 매일이 신세계였고, 새로운 도전이었다. “독일에선 학생들에게 같은 실력, 같은 생각을 원하지 않아요. 단순히 데생을 잘하기보다는 자신의 스타일과 개성을 작품에 뚜렷이 반영하는 학생을 인정하죠.” 사진 수업이라고 해서 단순히 사진 기술만 가르친다고 짐작하면 오산이다. “페리에 병을 찍는 과제가 있다고 해봐요. 보통은 그 병을 어떤 각도에서 어떤 조명으로 찍어야 할지 고민하겠지만 독일의 사진 수업에서는 페리에가 일반 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그 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등 대상의 본질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해요.” 그 때문에 유학 당시 교수들이 가장 많이 내준 과제도 ‘정물’과 ‘셀프 포트레이트’였다. 어떤 대상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는 훈련, 자화상 작업을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고 알아가는 훈련을 시킨 것. 그는 과제를 수행하며 ‘본질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군더더기를 없애는 과정’이 있어야 명작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아름다운 디자인’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써요. 디자인에 표면적으로 접근하는 거죠. 그런데 독일 사람들이 보기에 그건 ‘design’이 아니라 ‘decoration’이에요. 장식적 요소, 포장적 요소, 한마디로 본질을 흐리는 군더더기를 다 떨궈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디자인인데 우리는 그걸 몰라요. 독일 교수들이 조형, 사진, 디자인 수업에서 하나같이 강조한 것이 사물의 본질을 들여다보라는 것이었어요.” 철저하게 계산한 디자인, 최소한의 장식만 남겨둔 독일 유학 시절의 습작 ‘사과’, ‘자화상’, ‘무제’ 시리즈 등은 지금 봐도 30년 전 사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세련됐다.




1 ‘마당에서 형제와 사촌과 함께’, 1959 가장 중앙이 구본창 작가. 3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구본창은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어릴 적 그림에 빠진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2 ‘독일 유학 시절’, 1985 독일 유학 시절 매일 아침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짊어지고 나타나 독일 친구들에게 ‘당나귀 구’라는 별명으로 불린 구본창 작가
3 ‘<기쁜 우리 젊은 날> 촬영 당시’, 안성기, 1987 1987년에 구본창 작가는 연세대학교 동기인 배창호 감독의 의뢰로 안성기, 황신혜 주연의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의 포스터를 촬영했다. 그 후 <장군의 아들>, <서편제>, <태백산맥>,<취화선>의 포스터 까지 찍게 됐다. 포스터 속의 안성기가 구본창 작가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 ⓒUli Mazurkiewitz

“지금 다시 봐도 맘에 들어요.(웃음) 좋은 디자인은 오래가잖아요. 제가 가끔 특강할 때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광고 사진이 있어요. 1954년 샤넬 향수 광고죠. 그런데 그게 지금 샤넬 광고랑 거의 흡사해요. 병도 똑같고, 그 병 하나를 정가운데 놓고 찍은 구도도 비슷해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건 그런 것 같아요. 시대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대상의 본질에 충실할 때 비로소 예술의 생명력은 오래가죠.”
독일의 저명한 사진 평론가 안드레 겔프게 등 독일에서 만난 여러 인연 덕분에 그는 해외에서 먼저 활동을 시작했다. 겔프게의 친구가 일본의 사진 에이전시를 소개해 1985년에 ‘일본의 하루’라는 사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일본의 하루’는 세계 100명의 사진가에게 필름을 주고 각기 다른 장소에서 일본의 하루를 카메라에 담는 프로젝트로, 구본창은 엑스포가 열린 쓰쿠바의 풍경을 맡았다. 유학 시절 함부르크 주변의 유럽 도시를 스냅으로 찍은 적은 있지만 그렇게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라 막연했다. “쓰쿠바 엑스포가 열리는 당시 상황을 독특하게 표현하는 게 가장 좋겠다 싶어서 제 눈에 신기하다 싶은 것은 닥치는 대로 찍었어요. 필름 제한은 없었고, 다 찍은 필름을 넘겨주면 프로젝트 주최측에서 선정하는데, 제 사진이 4페이지에 걸쳐 실렸죠.” 실력을 인정받아 자신감도 한껏 부풀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미국의 하루’ 프로젝트에도 초청되었다. 그에게 배정된 도시는 댈러스. 그러나 지난해와 달리 그가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선정되지 않았다.
“프로젝트에 초대되어 1986년에 처음 미국에 갔어요. 미국 땅을 처음 밟았으니 얼마나 신기하고 궁금한 게 많았겠어요. 마침 현지에서 저를 어시스트한 조수가 미국에서 사진학과에 다니는 학생이었어요. 미국 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궁금해서 프로젝트 리서치하는 날 리서치는 안 하고 학교 구경을 갔어요. 근데 당시 댈러스가 워낙 큰 도시라 저 말고 다른 한 명의 사진가도 프로젝트에 투입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런던 타임스> 사진기자였더라고요.” 댈러스의 24시간을 찍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구본창은 아침 7시에 일어나 촬영을 시작했는데 <런던 타임스> 기자는 말 그대로 0시부터 촬영에 돌입한 것. 댈러스의 산부인과 출산 현장 촬영을 시작으로 다음 날 자정까지 댈러스의 하루를 완벽히 담아낸 그 앞에서 구본창은 한없이 작아졌다. “철저히 촬영 준비를 한 사람과 저 사이에 게임이 될 리 없었죠. 제 사진은 결국 하나도 뽑히지 않았어요. 정말 창피했는데, 오히려 잘됐어요. 호되게 당한 뒤 제 사전에 ‘방심’이라는 단어가 없어졌거든요.”




1 ‘탈’ 시리즈, 북청사자 05, 2003 구본창 작가는 2000년대에 들어서 전통문화와 역사라는 주제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기표현에서 출발한 작업이 서서히 전체를 아우르는 방향으로 흐른 것이다. ‘탈’ 시리즈는 그가 자신의 감성에서 벗어나 객관적 관심사로 접어드는 계기가 된 작품으로 ‘탈’ 시리즈를 통해 생명 없는 얼굴 뒤에 숨은 옛사람의 숨결을 읽어내고 있다.
2 구본창 작가의 작업실에 놓인 ‘탈’ 시리즈 작품과 작가의 수집품. ‘탈’ 시리즈 작품 앞으로 작가가 수집한 자기와 촛대 등이 눈에 띈다. 그는 2011년 <컬렉션> 전시에서 지금껏 수집한 수집품 일부를 함께 전시하기도 했다.
3 ‘시선 1980’ 시리즈, 서울, 을지로, 1985~1990
4 ‘시선 1980’ 시리즈, 경기도, 청평, 1985~1990 독일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마음 둘 곳 없이 낯선 이방인처럼 지내던 구본창 작가는 한국의 키치한 모습을 필름에 담아내며 소통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곤 했다.

예술은 존재에 대한 물음
구본창 작가 하면 ‘숨’, ‘태초에’, ‘백자’, ‘탈’ 시리즈 등을 흔히 떠올리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발표한 숱한 작품을 하나하나 넘기다 보면 작품에 얼마나 다양한 소재와 주제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있다. 함부르크 유학 시절 정물과 셀프 포트레이트로 시작해, 안드레 겔프게에게 “한국인으로서 아이덴티티를 가져라”라는 조언을 들은 뒤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1분간의 독백’, 도시의 일상을 무작위로 촬영한 ‘긴 오후의 미행’과 ‘시선 1980’, 자신과의 갈등과 화해를 담은 ‘열두 번의 한숨’, 포토그램 기법(인화지 위에 대상을 얹어놓고 노광을 주는 기법)을 선보인 ‘생각의 바다’와 나비 박사 석주명 씨에 관한 기사에서 영감을 받아 곤충의 불안감을 표현한 ‘굿바이 파라다이스’ 등 어느 한 소재에 국한하지 않고 늘 다양한 것에 관심을 둔 채 작업해왔다.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 <장군의 아들>, <축제>, <태백산맥>, <취화선>의 포스터를 찍고 많은 패션 브랜드의 광고 촬영장에 카메라를 들고 선 것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태초에’ 시리즈, 1998 타인의 신체를 피사체로 삼은 ‘태초에’시리즈는 인간의 불안정한 모습을 표현한다. 인화지를 서로 겹겹이 쌓아 실로 이었는데, 서로 겹친 인화지는 삶의 무게를 암시한다.

“일단 제가 호기심이 많아요.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죠. 그리고 그 대상을 관찰해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을 뽑아내는 과정을 즐기는 것 같아요. 어떤 사진작가는 ‘난 인물 사진 못 찍어서 안 찍는다’고 하는데, 저에게 인물은 인물대로 매력이 있고, 정물은 정물대로 매력이 있어요. 풍경이든 인물이든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과정이 즐겁고, 그 희열 때문에 사진 작업을 계속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는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개인적 흔적을 담고 기록해 보편적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는 것에 집중한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기본적 역할 중 하나다. “제 사진이 사회의 어떤 일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지만 각자에게 삶의 의미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고 생각해요. 예술이 어떤 해답을 명확하게 들려줄 순 없지만 작가들은 예술을 통해 대중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중은 예술을 통해 세상을 다채롭게 볼 수 있죠. 그러고 보면 예술은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대중이 함께 호흡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남들에겐 ‘사진 한 장’이 구본창에게는 ‘세상을 보는 구본창의 방식’이다. 그래서 사진 한 장도 그에겐 늘 조심스럽다. 촬영 전날에는 촬영 대상에 대한 공부를 완벽히 끝내야 마음이 놓이는 것도 오랜 습관. 드라마 촬영 내내 연기자가 배역의 감정에 몰입하듯 그도 촬영 대상이 정해지면 끊임없이 대상과 그 주변의 것을 머릿속에 주입시킨다. 촬영 당일, 셔터를 누르는 타이밍도 그는 매우 신중히 결정한다.
“대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어요. 백합꽃을 찍을 때를 가정해보면 싱싱하다고 해서 꼭 아름다운 건 아니에요. 화병에 꽃을 풀고 하루 이틀 지나 그 안에서 백합이 자리 잡고 편안한 상태가 되는 시점이 있어요. 그때가 제일 아름답죠.” 눈앞에 놓인 사물에 마음이 동할 때, 그것이 비로소 말을 걸어올 때 구본창 작가는 셔터를 누른다. 빛의 방향과 세기, 작가의 정신적·육체적 평정과 사물의 상태가 최고조에서 만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결정적 순간이다. “어떻게 찍어야 좋은 사진이 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어떻게 찍느냐보다 찍히는 대상이 명품이어야 좋은 사진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좋은 역사와 이야기를 지닌 사물과 사람은 스스로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체에서 빛나지 않으면 아무리 잘 찍어도 좋은 사진을 얻기 힘들죠.” 어떤 사진작가보다 본질에 충실한 작품을 선보이는 구본창 작가. 그럼에도 여전히 군더더기를 걷어내는 과정의 한 지점에 있는 구본창의 본질을 우리는 지금 보고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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