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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16 ISSUE

관계의 금자탑

  • 2017-02-01

조각가 김병호가 전남 순천 송광사에 탑 하나를 설치했다. ‘모듈’이라는 단위를 조형적으로 배열한 작품은 마치 황금처럼 빛났고,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에 설치한 김병호 작가의 청동탑 작품 ‘매개 기억’


전남 순천의 송광사는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함께 한국의 ‘삼보사찰’로 이름난 곳이다. 또 국내 사찰 중 가장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며, 고려시대에 16명에 달하는 국사를 배출한 전통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가장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재로 가득한 이곳에도 한 가지 없는 게 있다. 바로 탑이다. 송광사엔 다른 사찰에선 흔한 석탑이나 석불 같은 조형미가 뛰어난 불교 예술품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 탑이 없는 이유와 관련해 두 가지 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중 하나는 이곳의 지형이 물에 뜬 연꽃 형상으로 무거운 석탑을 세우면 가라앉는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사찰 터에서 나오는 돌은 색이 검고 철 성분이 많아 석탑을 만들기에 맞지 않아 그렇다는 설이다.
그런데 이 사찰에 최근 탑이 하나 생겼다. 해발 848m의 조계산 계곡물이 굽이치는 청량각 앞에 뾰족한 무언가가 자리한 것이다. 한데 그간 봐온 흔한 석탑은 아니다. 멀리서도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번쩍번쩍한 청동탑이자 ‘매개 기억(Mediated Memory)’이란 이름을 가진 미술품이다. 이곳에 탑을 설치한 이는 정밀하게 세공한 금속으로 조각 작품을 만드는 작가 김병호. 엄격하기로 이름난 송광사가 처음으로 외부에서 탑을, 그것도 이제 막 공장에서 나온 매끄러운 외형의 현대미술 작품을 받아들인 것이다.






1 사찰에 들어온 청동탑을 기념하기 위한 제막식 행사  2 ‘매개 기억’은 2000여 개의 개별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병호는 그간 모듈을 디자인해 대량생산한 후 그 모듈을 다시 조립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다. 그가 드로잉이라 부르는 설계도는 정확한 수학적 계산을 거쳐 제작하며, 드로잉을 구현하기 위한 전 과정 또한 엔지니어와 함께 진행한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해 완성하는 그의 작품은 마치 디자인 제품처럼 매끈하며, 완전무결한 추상으로 환원되는 지점에서 특유의 아름다움을 전한다. 그런데 그는 대체 왜 이곳에 탑을 설치한 걸까?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가 아닌 일상의 공간에서 관람객과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탑은 예부터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종교적 상징체지만, 우리에겐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무언가였죠. 종교에 관계없이, 우린 탑 앞에서 두 손 모아 가족의 건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습니다. 탑이 일종의 ‘매개 역할’을 한 셈이죠. 저는 이번 작업이 미술관에서 나온 현장 미술로서 또 하나의 ‘매개’가 될 수 있길 바랐습니다.”
그는 지난 2013년부터 이 작품을 구상했다. 같은 해에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정원 속의 정원(Garden in the Garden)>에 출품한 ‘관계성’에 관한 작품 ‘The Manipulation’에서 힌트를 얻었다. 이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현 작품의 기본이 되는 모듈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그는 탑 작품을 설치할 사찰을 물색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누볐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사찰을 찾는 게 최우선이었지만, 너무 관광지화되었거나 이미 과도하게 미술품으로 포장되어 긴장감이 떨어지는 사찰은 가능한 한 피하고 싶었다. 그러다 송광사를 발견했다. 송광사는 산세가 부드럽고 아늑한 특징이 있었다. 또 사찰 옆으로 조계산을 오르는 산책로가 있었다. 그 말은 좀 더 많은 이에게 작품이 노출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오후 3시, 그의 얘기를 듣다 잠시 산책에 나섰다. 숲길을 따라 걷다 자연스레 그의 작품 앞에 섰다. 탑 가장자리로 경쾌한 소리를 내는 개울이 흐르고, 여전히 밝게 빛나는 태양은 자꾸 탑의 정수리에 부딪쳐 그 일대를 환히 비췄다. 작품 앞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하고, 손으로 퉁퉁 두드려보기도 했다. 한참을 작품 앞에서 서성이자 몇몇 등산객이 신기한 듯 다가와 ‘이게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다. 그들은 높이 3.6m, 무게 3톤에 이르는 청동 조각으로 이뤄진 금빛 탑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또 그것을 어떤 거리낌도 없이 만지고 긁고 손을 뻗어 와락 안기까지 했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탑의 원형과는 사뭇 달라요. 만약 그 모양을 그대로 모방했다면 골동품적 가치조차 없는 모조품으로 전락했겠죠. 제가 작품에 사용하는 모듈은 원래 하나만 있으면 그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서로 기능적으로 연결되어야 하죠. 이 작품은 A와 B가 서로 연결돼 관계성을 지닌다는 의미에 특히 집중했어요.”






3 청동탑 프로젝트로 또 다른 미술 실험을 하는 김병호 작가  4 김병호 작가의 ‘매개 기억’은 앞으로 1년간 송광사에 설치된다.


한편 지난 10월 15일 송광사에선 김병호 작가의 청동탑 작품 설치를 기념하는 공식 제막식이 열렸다. 송광사의 주요 스님들이 나섰고, 과일과 떡을 올린 상이 등장했다. 행사는 30여 분간 이어졌는데, 한동안 불교의 대표적 경전 <반야심경>을 읊는 염불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당시 제막식에 참석한 한 스님은 작품에 대해 묻는 질문에 “같은 모양의 조각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탑을 이루었다”며 “그것이 대승불교의 기본이 되는 철학”이라고 답했다. 또 다른 스님은 “처음엔 전체를 이루는 개별 조각들이 총알처럼 보여 다소 놀랐지만, 다시 보니 세상만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緣起)의 법칙’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날 스님들의 염불이 끝나고, 상 위에 놓인 과일과 떡이 소진되자 그 자리엔 다시 청동탑만 남았다. 한동안 많은 등산객의 손길을 탔지만, 어떤 순간엔 바람만 그곳을 지나쳤다. 오직 물소리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줄 뿐이었다.
김병호 작가의 청동탑 작품 ‘매개 기억’은 앞으로 1년 동안(10월 15일~2017년 10월 14일까지) 송광사에 설치된다. 그는 이번 탑 프로젝트를 통해 미술의 어원이 그렇듯 ‘기술 능력’이라는 원초적 행위와 관계의 속성을 탐구했다. 그의 탑은 아직 금빛을 띠고 있지만, 곧 비바람과 눈보라, 사람들의 손길을 거치며 청동의 속성대로 검은빛으로 바뀔 것이다. 그는 이 전시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곳에서 같은 프로젝트를 이어갈 예정이다. 작품 ‘매개 기억’은 송광사 전시가 끝나면 제작을 지원한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기증된다.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사진 김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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