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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15 FEATURE

소피 힉스의 시대정신

  • 2015-10-20

청담동에 문을 연 아크네 스튜디오의 플래그십 스토어는 서울에 불시착한 스웨덴발 우주선 같다. 겉과 속이 완벽히 다른 그곳은 건축가 소피 힉스의 철저한 계산에 따라 완성됐다. 절제와 겸손, 충동과 자유의 에너지가 팽팽하게 맞선 긴장이 아크네 스튜디오라는 브랜드를 쏙 빼닮았다. 패션과 건축이라는 다른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그녀가 말한다. “패션과 건축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가장 훌륭한 예술 형식”이라고.

<센세이션>전 전경
ⓒThe ⓒJohannes Marburg Saatchi Collection




흰색 사원처럼 꾸민 요지 야마모토의 파리 플래그십 스토어
ⓒJohannes Marburg




그녀의 작품에서 계단은 매장에 들어온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중요한 요소다. 아크네 스튜디오 내부에 생기를 부여하는 나선형 계단에 선 소피 힉스

“스웨덴은 빛과 공기의 땅이다. 생기 넘치는 빛과 깨끗하고 신선하며 상쾌한 공기는 희열과 비현실을 유도한다. 매장의 분위기는 비현실적이고, 서울의 경관과 단절될 것이다.” 청담동에 문을 연 아크네 스튜디오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설계한 영국 건축가 소피 힉스(Sophie Hicks)의 스테이트먼트다. 그녀의 의도대로 이곳을 처음 방문한 누구라도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다.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 반투명 폴리카보네이트 패널로 장식한 사각형의 미니멀한 외관은 ‘세계적’ 건축가들의 스펙터클한 건축-조형물이 우상처럼 들어선 서울에 떨어진 작은 우주선을 연상시킨다. 콘크리트 계단을 올라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면 거칠고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시선을 압도한다. 4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2층 건물을 떠받치는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크네 스튜디오 특유의 철제 선반과 옷걸이, 폴리카보네이트 패널과 콘크리트의 대비되는 질감, 사방을 동일하게 비추는 빛의 산란으로 내부의 ‘비현실적’ 분위기는 한층 강화된다.
소피 힉스는 패션을 잘 아는 건축가다. 아크네 스튜디오 외에도 폴 스미스, 끌로에, 요지 야마모토 등의 브랜드를 위해 리테일 작업을 진행했다. 끌로에는 100개가 넘는 숍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시즌마다 새로운 미래를 동경하는 패션과 한번 지으면 평생을 기약하는 건축의 극명히 다른 시간 통로를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패션 에디터로 커리어를 시작했기 때문일 터. 열일곱 살에 <하퍼스 & 퀸스>의 틴에이저 패션 특집에 게스트 에디터로 참여한 이후 20대 중반까지 <태틀러>, <브리티시 보그> 등의 유명 잡지에서 패션 에디터로 명성을 쌓았다. 롱 셔츠와 통 넓은 바지, 신발까지 검은색으로 통일해입고 등장해 촬영 장소와 카메라 앵글, 표정과 몸짓 등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챙기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머문 청춘의 시공간이 패션계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소피 힉스의 보이시한 스타일은 유럽 문화 예술계의 아이콘에 가깝다. 어린 시절 미용사의 실수로 탄생한 선머슴 같은 짧은 머리, 평소 즐겨 입는 끌로드 몬타나(Claude Montana)의 세일러 슈트나 품이 넉넉한 하얀 리넨 셔츠는 ‘소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데이비드 베일리(David Bailey)가 촬영한 검은 테이프로 애꾸눈을 만들고 미소 짓는 그녀의 홍조 띤 얼굴 사진이 <i-D>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했을 때, 해당 특집의 주제는 ‘소년은 소년이 될 것인가? 소녀는 소녀가 될 것이다!(Boys will be Boys? Girls will be Girls!)’였다. 이탈리아의 명장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영화 <L’Intervista>에는 풍만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 사이에 슈트를 차려입은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혹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성 정체성을 오해할 수도 있겠다. 현재 소피 힉스는 런던 노팅힐에서 사진가이자 작가인 남자친구와 살고 있으며,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하다. 두 딸 에디와 올림피아는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전도유망한 모델로 활동 중이며, 2014년 랑방의 F/W 광고 캠페인에는 어머니와 두 딸과 아들이 함께 등장하기도 했다. 일종의 ‘소피 힉스 사단’인 셈이다.




잘나가는 패션 에디터에 이어 아제딘 알라이아(Azzedine Alaïa)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한 그녀가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돌연 건축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나만의 무언가를 창조해보고 싶었다. 독보적으로 창조적인 인물이 되는 것 말이다.” 건축 관련 포트폴리오 하나 없이 세계 최고의 건축설계 학교로 꼽히는 AA 스쿨에 합격한 소피 힉스는 ‘남성의 왕국’이나 마찬가지인 건축계에 뛰어들었다. 늦다면 늦은 나이지만, 다행히 남들보다 빨리 첫 작업 의뢰가 들어왔다. 3학년 무렵 영국 왕립 미술원에서 열린 <Pop Art>전의 공간 디자인을 맡은 것. 특히 영국 현대미술이 세계 미술계의 주역으로 떠오른 기념비적 전시 <센세이션(Sensation)>의 디스플레이가 소피 힉스의 작업이라는 사실은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듬해 노팅힐에 문을 연 폴 스미스의 첫 플래그십 스토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건축가로서 커리어에 탄력이 붙었다. 이후 시거슨 모리슨, 끌로에 등에서 그녀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취향이 까다로운 브랜드들이 그녀를 적임자로 지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패션과 건축은 ‘시대정신(zeitgeist)’을 반영하는 가장 훌륭한 예술 형식”이라는 그녀만의 명쾌한 철학이나 브랜드의 비전을 명징하게 시각화하는 탁월한 감각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브랜드를 위한 연구와 고민으로 얻은 성취에 가깝다. “어떤 작업을 하든 브랜드를 이해하는 일이 최우선이다. 캐릭터를 연구한다고 보면 된다. 현지 사무실을 방문해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철저히 파악한다. 아크네 스튜디오와의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의뢰가 들어왔을 때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스톡홀름으로 떠날 가방을 꾸린 것이다. “내가 본 스웨덴 사람은 보수적이고, 자기 절제를 위해 애쓰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을 지녔고, 민주적 평등을 중시한다. 반면 아크네 스튜디오는 강하다. 벽을 깨고 나아가고, 브랜드가 돋보이도록 목소리를 뽐낸다. 스웨덴 브랜드가 아닌 것 같은 점이 특징이랄까.(웃음)” 그녀는 스웨덴의 정취와 아크네 스튜디오라는 브랜드 사이에서 발생하는 묘한 긴장을 서울 매장에 담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외부의 얌전한 사각형이 스웨덴의 민족성을 반영한다면, 내부의 콘크리트 구조가 자아내는 으스스한 생동감은 아크네 스튜디오라는 브랜드 그 자체다. 상자 속에 든 괴물처럼.”
서울에서 소피 힉스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랫동안 공들인 프로젝트의 결과가 그녀의 맘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녀에게 꼭 해보고 싶은 작업을 물었다. 건축가라면 누구나 가슴에 품은, 그러나 실현하기 쉽지 않은 ‘꿈의 프로젝트’ 말이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웃으며 답했다. “호텔! 나는 호텔이 정말 좋다. 호텔의 모든 것을 디자인해보고 싶다.” 머지않아 소피 힉스가 창조한 ‘괴물’ 같은 호텔을 방문하는 즐거운 사건을 기대해봐도 좋겠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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