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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16 LIFESTYLE

애서가와 장서가, 포도밭 놀이의 나날

  • 2016-01-21

장서 문화가 가장 아름답게 꽃핀 중세 유럽. 단 한 권의 책이 가옥 한두 채와 비길 만큼 값지던 그때, 책을 통해 신에게 닿길 소망하고 사랑을 나눈 애서가와 장서가의 이야기를 엿본다.

전 6권으로 만든 보헤미아 벤첼 왕의 성서. 테두리에 그림을 그리고 삽화에 색을 칠한 ‘채식사본’의 전형이다.





향기로운 문자, 언제나 봄
태어나면서부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어려서부터 그에게 책은 읽기에 앞서 어루만지고 가슴에 품는 오브제, 가까이에 두는 것만으로 일상의 삶에 따뜻함을 더하는 조형 작품이라 할까. 책과 함께 있으면 심상(心像) 풍경은 사시장춘(四時長春), 언제나 화창한 봄이다. 그러므로 그는 항시 서점, 특히 고서점을 찾고 여행길에서도 서점을 만나면 설레는 마음으로 끌려든다.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둘러싼 글을 읽다 보면 언제나 즐겁고 기쁘다. 책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애서가·장서가 이야기는 아름다운 책 이야기, 호화 희귀본의 세계가 따르기 마련인 만큼 참으로 포도밭을 거니는 듯 향기롭다.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 우주의 모든 피조물은 한 권의 책, 한 폭의 그림 그리고 한 편의 거울이리라. ?





브라이틀링 기계식 뮬리너 투르비용 시계





애서가·장서가의 ‘천국을 향한 사랑’
반듯한 독서인은 애서가(bibliomania)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애서가가 반드시 장서가일 수는 없다. 우리는 유럽 문화사상 최초의 애서가이자 장서가로 중세의 신비주의적 스콜라 학자 생 빅토르 위그(Hugues de Saint Victor, 1094~1141년)를 들 수 있다.
위그에게 독서란 ‘영혼의 치유’를 위한 순례의 길이었다. 그는 독서에서 책, 성서의 모습으로 받든 신의 아들을 찾았다. “탐구해야 할 모든 것 중에서 최초의 것은 지혜다.” 독서 방법을 논한 그의 주저 <학습론>의 머리말 중 한 구절이다. 지혜는 사람을 비추고 자기 자신에 눈뜨게 한다. 위그에 따르면 책의 모든 페이지는 빛을 발산한다. 독서가 치유자 그리스도에 가까워짐을 의미할진대 ‘독서의 학습’은 만인에게 주어진 소명임이 분명하다. 위그에게 독서는 순례의 길이었다. 순례를 위해서는 ‘한가(閑暇)’가, 일상적인 것 그리고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한가가 절실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진실로 울림을 남긴다.
이제 최초의 애서가이자 <필로비블리온(Philobiblion, 책에의 사랑)>의 저자 리처드 드 버리(Richard de Bury, 1287~1345년)를 만나보자. 영국 태생인 버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습, 철학과 신학 학위를 받고 왕자의 교육계가 되었다. 왕자가 에드워드 3세로 왕위에 오르자 주교좌 성당의 주교직, 재무대신, 국새상서까지 최고 관직도 차지했다. 만년에 공직에서 물러나 한가한 나날을 맞이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간 수집한 장서의 목록을 작성하는 한편 <필로비블리온> 저작에 착수했다. 그리고 1344년 그 책이 간행되자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애서가의 성서로 불리는 <필로비블리온>은 이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15세기에 이르도록 성서를 잇는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고, 오늘날에도 유럽 독서인의 필독서로 꼽힌다. <필로비블리온>은 그 자신의 지나친 애서욕, 장서욕에 대한 자기변명의 책이기도 하다. 그의 장서는 약 1500권에 달했다. 그 당시 파리 소르본 대학교의 장서가 약 800권이었고, 수도원 필사실에서 왕족·귀족이나 성당의 부탁을 받아 수도사들이 손으로 보통 1~2권, 기껏 많아야 4~5권 제작하던 시대였다. 이때 책은 단 한 권의 값이 가옥 한두 채와 비길 만큼 값비싼, 모두 아름답고 호화로운 희귀본이었다. “이 책의 가치를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거늘 왜 값비싸다고 하는가? 값비싸다 하여 책 사기를 망설여서는 안 된다.” 책 욕심이 지나친 버리는(그러한 탐욕은 수집광으로 불린 모든 장서가의 악덕이자 미덕이었지만) 후손에게 적지 않은 부채를 남겼다 한다. 버리는 책의 머리말에서 책 수집에 쏟은 정열을 ‘천상적 사랑’에 비유하고, 그것이 “이 지상의 모든 것을 잊게 한다”고 토로했다. “사랑의 반듯한 질서에 따라 어떠한 부나 쾌락도 책에는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지혜 가득한 서고는 어떤 금은보석보다도 소중하며 다른 모든 바람직한 것도 그에 비길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책, 책이 베푸는 최대의 공덕(功德)으로 특히 그것이 성(聖)과 속(俗)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우리의 삶을 지상으로 혹은 천상으로 비상케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신은 실체인가, 아닌가”라고 신의 존재에 의심을 품은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아벨라르는 또한 삶을 자기 방식대로 누린 최초의 근대적 인간이기도 하다. 그 아벨라르를 그리고 엘루아즈를 찾아가보자.





귀금속과 황금으로 장정한 카를 2세의 호화 복음서





저작을 집필하는 성 그레고리우스와 3명의 사자생. 상아 장정 표지, 10세기





아벨라르와 엘루아즈의 삶과 사랑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명성을 누린 철학자 아벨라르(Abelard, 1079~1142년). 그는 그의 학원 청강생인 귀족 가문의 엘루아즈(Heloise)를 개인 지도를 받는 제자로서 가까이하게 되었다. 아벨라르에 따르면 엘루아즈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한 박학다식에 더해 ‘사람을 이끄는 모든 매력을 갖춘’ 재원이었다. 원래 기사(騎士), 즉 무관으로서 문자를 멀리한 탓에 자기 이름도 쓰지 못해 사인으로 대신한 문맹자 귀족이 적지 않은 그 당시, 엘루아즈는 참으로 각별한 여인이었다. 한편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유일한 철학자’로 여긴 아벨라르. 스승과 제자는 곧 사랑의 포로가 되어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아벨라르는 39세, 엘루아즈는 17세였다. 그리고 그녀의 후견인인 숙부에 의해 아벨라르가 거세되어 이 스캔들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아벨라르는 수도원에 들어갔고 엘루아즈도 수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아벨라르에게는 그 학식에 끌려 많은 제자가 모여들었고, 그는 1128년 이후 대수도원장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간 두 사람 사이에는 12통의 라틴어 서간이 오갔다. 이른바 ‘아벨라르와 엘루아즈의 왕복 서간’이다. 엘루아즈는 아벨라르를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결혼에는 응하지 않았다. “자연이 만인을 위해 창조한” 그를 가정에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30세인 그 시절에 아벨라르는 63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엘루아즈에게 전해졌다. 엘루아즈는 아벨라르의 묘를 지키면서 22년간 더 살다 64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아벨라르와 합장했다. 그때 그의 곁에 그녀를 눕히니 아벨라르가 팔을 늘어뜨려 그녀를 꼭 잡았다고 한다. 여성으로서 아름답고 사상, 학식 면에서도 아벨라르에 비길 만한 엘루아즈는 지금도 아벨라르와 함께 한 묘 속에서 잠들어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정화한다. 두 연인의 사랑의 완성이다. 오늘날 그 묘역에는 프랑스의 역대 왕과 왕비를 비롯해 작곡가 벨리니, 작가 몰리에르, 발자크, 시인 라 퐁텐의 묘도 있다. 그런데 그중 방문객의 발길이 가장 오래도록 머무는 곳은 아벨라르와 엘루아즈의 묘라고 한다. “연애! 12세기의 발명이다”라고 했던가. 그 중심에서 엘루아즈와 아벨라르의 사랑이 불타고 있다.





에디터 | 신숙미(프리랜서)
글 | 이광주(인제대학교 서양사학과 명예교수) 사진 제공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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