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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26

베를린 모더니즘의 출발

에드바르 뭉크 개인전으로 살펴보는 베를린과 뭉크의 인연.

Red and White, 1899~1900 ©Munch, Oslo / Halvor Bjørngard
Seated Model on the Couch, 1924~1926 ©Munch, Oslo / Ove Kvavik


1892년에 열린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첫 베를린 개인전 이후 130여 년 만에 베를린 주립미술관(Berlinische Galerie)에서 9월 15일부터 다시금 뭉크 특별전을 개최한다. 회화, 판화, 사진 등 약 90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이 전시는 베를린 아트 신이 모더니즘으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뚜렷한 하나의 스타일을 제시한 뭉크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1870년부터 현재까지 탄생한 다양한 시각예술 분야의 컬렉션을 보유한 베를린 주립미술관은 도시의 미술사를 지속적으로 새로운 맥락과 스토리로 큐레이팅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많은 유럽 미술관이 보이는 양상이기도 하다. 유럽의 대도시 미술관은 훌륭한 작가의 작품을 얼마나 소장했는지, 그들의 예술 세계에 그 도시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등을 강조하며 문화적 영향력을 강조하는 데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만큼 이 전시도 노르웨이의 국민 화가 뭉크가 독일로 건너와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맺은 깊은 인연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뭉크와 베를린의 첫 만남
19세기 말 뭉크는 베를린에 도착해 동시대 예술계에 대담한 도전장을 던졌다. 오스트리아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가 “세기의 전환기에 독일 최고의 모든 창작 문학이 북구의 마법 같은 매력에 굴복했다”라고 회상했을 정도로 당시 베를린은 북유럽의 모든 것에 열광했다. 그런 흐름에 따라 베를린예술가협회는 1892년 11월 무명이던 뭉크의 개인전 개최를 추진했다. 당시 고전적인 미술계 주류의 취향은 주로 피오르 풍광을 그린 낭만적이고 자연주의적인 화풍이었다. 이번 전시도 아델스텐 노르만(Adelsteen Normann)의 작품과 독일 화가 테미스토클레스 폰 에켄브레허(Themistokles von Eckenbrecher), 발터 라이스티코(Walter Leistikow) 등의 작품을 통해 당대의 예술상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런 상황에서 신인 뭉크의 작품 55점은 전위적 도발이나 마찬가지였다. 관람객은 밝은 색채와 자유로운 선에 충격을 받았고, 형체를 단순화하거나 가장자리를 물감으로 채우지 않은 그림을 “스케치에 불과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분노한 베를린예술가협회 회원들은 전시를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했고, 결국 8일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이 사건은 ‘뭉크 스캔들(Munch Affair)’이라고 불리며 오히려 뭉크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었고, 이 젊은 예술가는 “이보다 좋은 광고는 없다”며 대중의 관심을 즐겼다. 뭉크 스캔들은 풍경 속에 인간의 심리를 품은, 거침없고 밀도 높은 뭉크의 시각적 우주를 선보였고, 베를린 현대미술에 새로운 흐름을 가져왔다. 뭉크는 그다음 달 베를린으로 이주해 1909년 노르웨이로 돌아갈 때까지 그곳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자신의 예술을 진지하게 평하고 그것을 기꺼이 대중과 나누려는 예술인들과 교류하며 1892년부터 1933년까지 무려 60여 차례 전시를 열었는데, 그중 다수가 개인전이었다.





오른쪽 Starry Night, 1922~1924 ©Munch, Oslo / Juri Kobayashi
왼쪽 Two Teenagers, 1919 ©Munch, Oslo / Ove Kvavik

삶-사랑-질투-광기-공포-죽음
이번 전시에서는 뭉크의 예술 전반에 드리운 테마를 품은 일생일대의 대표작 ‘생의 프리즈(Frieze of Life)’ 시리즈를 만날 수 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병으로 잃은 그는 자신도 오랜 기간 투병했고 다수의 연인과 행복하지만은 않은 관계를 맺으며 고뇌했다. 이런 생애에서 비롯한 묵직한 감정과 심리가 스민 작품들이 이번 전시의 중심을 이룬다. 뭉크는 이미 파리와 베를린 전시에서 발전시킨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1902년 베를린 분리파(Berlin Secession) 전시 당시 이 연작의 가장 큰 버전을 제작했다. 그의 친구인 아트 컬렉터 알베르트 콜만(Albert Kollmann)은 연작이 ‘삶-사랑-질투-광기-공포-죽음’을 중심 주제로 삼아 전개된다고 설명했다. 베를린 분리파 전시 당시 상징주의는 파리에서 이미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으나, 이에 익숙하지 않은 베를린 대중은 뭉크의 작품에 쉽사리 공감하지 못했다. 당시 평론가 한스 로젠하겐(Hans Rosenhagen)은 “색채에 대한 북유럽의 야수와 같은 욕구와 마네에게서 이끌어낸 관념, 꿈을 향한 무언가가 결합해 매우 독특한 것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 상황을 한탄했다. 하지만 점차 뭉크의 예술에 매료된 독일의 아트 컬렉터와 연극 연출가 등이 작품을 의뢰하기 시작하면서 뭉크의 존재감은 무게를 더해갔다.





오른쪽 The Man in the Cabbage Field, 1943 ©Munch, Oslo / Halvor Bjørngard
왼쪽 Dance on the Beach (The Linde Frieze), 1904 ©Munch, Oslo / Halvor Bjørngard

영광과 비극
베를린 분리파뿐 아니라 독일예술가협회(Deutscher Künstlerbund),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의 일원이기도 한 뭉크의 영향력은 차세대 표현주의자를 통해 더욱 선명해졌다. 이제는 뭉크의 작품에 ‘게르만의(Germanic)’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으며, 1927년에는 이 표현주의의 선구자에게 헌정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전시회가 베를린 국립미술관에서 열렸다. 244점의 작품을 망라한 대규모 개인전은 명실공히 북유럽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뭉크를 조명했다. 그러나 영광의 시간을 지나 뭉크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치하 독일에서 ‘퇴폐미술’을 명명하는 정치적 잣대의 초기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점령한 후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과 관련 서류를 오슬로시에 기증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했고, 이때 확보한 소장품을 바탕으로 1963년 오슬로에 문을 연 뭉크 미술관은 전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뭉크의 작품을 보유하게 됐다.
상설전과 소규모 특별전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번 개인전은 내년 1월 22일까지 문을 활짝 열어둔다. 독일어와 영어로 해설하는 무료 오디오 가이드를 빌리거나 전시 투어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 있는 바르베리니 미술관(Museum Barberini)에서도 11월 18일부터 내년 4월 23일까지 뭉크의 개인전이 열린다. 올 연말연시에 베를린을 방문한다면 뭉크의 일생과 예술을 다채롭게 조망하는 좋은 기회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미솔(미술 저널리스트)
에디터 백아영(프리랜서)
사진 베를린 주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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