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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0

과거와 현대의 만남

문화 칼럼니스트 정준호가 여섯 편에 걸쳐 전하는 이탈리아 여행기. 그 첫 장.

암브로시아나 도서관 외관과 설립자 보로메오 추기경 동상.

밀라노의 열 가지 보물
지난여름, 40℃의 불볕더위가 훑고 지나간 이탈리아는 9월에도 잔열이 여전히 상당했다. 2주간 밀라노부터 베로나, 돌로미티, 로마, 나폴리를 얼마 남지 않은 퍼즐 조각 맞추듯 숨 가쁘게 다녔다. 이탈리아를 찾는 한국인은 대개 로마나 밀라노 공항으로 입국할 테다. 모든 길이 통하는 로마야 말할 것도 없고, 밀라노도 로마 못지않은 중요한 관문이다. 평소 로마를 주로 이용하던 나였지만, 이번에는 밀라노를 통해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다음 목적지 베로나와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밀라노는 산업과 문화의 중심지이자 전 세계인의 이목이 쏠리는 도시이기도 하다.
내 주변에서 밀라노를 자주 찾는 사람은 세 부류로 나뉜다. 이곳에서 열리는 산업 박람회를 주 무대로 하는 전문인, 패션과 디자인 분야 전문가로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창작자, 그리고 라 스칼라 극장을 안방처럼 드나드는 오페라 애호가. 그런데 일정이 바쁜 탓에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나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보지 못했다는 이가 허다하다. 그들에게 나는 스키라 출판사가 낸 <밀라노: 열 개의 걸작(Milan: Ten Masterpieces)>이라는 소책자를 보여주고 싶다. 밀라노가 자랑하는, 놓치지 말아야 할 보물 같은 걸작들을 나열해보겠다.

1.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의 ‘젊은 여인의 초상’
2.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브레라 제단화’
3. 안드레아 만테냐의 ‘그리스도 주검 위의 슬픔’
4.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5. 라파엘로의 ‘동정녀의 결혼식’
6.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
7.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
8. 프란체스코 아예츠의 ‘입맞춤’
9.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의 ‘제4계급’
10. 움베르토 보초니의 ‘갤러리의 폭동’





왼쪽 폴디 페촐리 박물관에 걸린 '젊은 여인의 초상' 이미지.
오른쪽 폴라이우올로의 '젊은 여인의 초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야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고, 2·3·5·8·10번 작품을 전부 소장하고 있는 브레라 미술관은 밀라노 기행의 필수 코스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이번 여행 동안 밀라노에 체류한 가장 큰 목적은 바로 1번과 7번 작품을 다시 보는 것이었다. 먼저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소장하고 있는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는 최초의 정물화로 꼽히는 명작이다. 예전에 방문했을 당시에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기억으로만 남겨뒀지만, 지금의 도서관 내부는 갤러리처럼 꾸며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띠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스케치의 경우 몇 년 전만 해도 축소판 복사본으로 전시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별도의 방을 마련해 그 원대한 계획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도서관을 세운 인문주의자 보로메오 추기경(1564~1631)이 들으면 기뻐할 변화다. 감상에 젖어 머뭇거릴 틈도 없이 1번 작품,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의 ‘젊은 여인의 초상’을 위해 폴디 페촐리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폴라이우올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무심하게 사진 몇 장만 찍었을 뿐. 그런데 2021년에 발매된 음반 하나가 나를 뒤흔들었다. 바로 북독일 태생의 작곡가 필리프 하인리히 에를레바흐(1657~1714)의 것이었다. 그는 생애 대부분을 튀링겐 지역의 궁정 악장으로 일했던 인물이자 바흐, 헨델보다 한 세대 선배였다. 안타깝게도 사후 1000곡에 달하는 악보 대부분이 불탄 탓에 오랫동안 그의 실력은 간과되었다고. 남은 70여 곡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곡은 앨범에 발췌된 소나타와 아리아집 <음악 친구들의 조화로운 기쁨(Harmonische Freude Musicalischer Freunde)>이다. 매혹적인 성악과 기악이 어우러지는 아리아는 틀림없는 바흐의 뿌리이며, 소나타에는 이탈리아 감성의 정수가 녹아 있다. 어쨌든 이 음반의 커버를 폴라이우올로의 ‘젊은 여인의 초상’으로 쓴 안목은 탁월했다. 10개의 밀라노 보물 가운데 하나이니 말이다. 올여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을 통해 국내에서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아폴로와 다프네’를 마주하며 폴라이우올로의 참모습을 새삼 엿보았던 참이라 밀라노에서 만난 그는 더 반가웠다. 마침내 폴디 페촐리 박물관 제일 안쪽의 ‘황금의 방’에 도착했다. 폴라이우올로가 담은 이 여인은 마치 위 앨범에서 말하는 ‘음악 친구들’의 숭배 대상인 듯 꼿꼿하고 단정한 옆모습으로 화가의 모델이 되었다. 내 머릿속에는 바이올린과 오르간이 반주하는 음률이 흐르고 있었다.





위쪽 암브로시아나 도서관 내부 전경.
아래쪽 밀라노 수호성인을 모신 성 암브로시우스 바실리카의 고즈넉한 아침.

마르거라, 뜨거운 눈물이여 / 눈이여, 더 밝아지라 / 한숨아, 더는 고개 들지 말아라 / 태양이 솟아오르리니

앞서 언급했듯, 나는 밀라노가 아닌 로마로 주로 드나든다. 현대보다 고전에 무게중심을 둔 나에게 실상 밀라노는 이류 도시다. 로마나 피렌체, 베네치아는 자랑할 보물을 고작 10개로 추리지 않는다. 심지어 밀라노 보물의 창작자 가운데 대부분은 밀라노 태생이 아니다. 과거 이 도시는 남쪽에 비해 문화적으로 열등했다. 르네상스 시대 밀라노 군주 갈레아초 스포르차는 한껏 으스대며 피렌체를 방문했다가 그곳의 드높은 문화 수준에 주눅 들었다. 그리고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이자 ‘위대한 자’로 불리던 로렌초가 허영심 많은 밀라노 군주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보내준 덕에 ‘최후의 만찬’이 탄생했다. 내가 보기에 밀라노의 강점은 ‘편집’에 있다. 편집은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 작품을 아이콘으로 탈바꿈시킨다. 암브로시아나 도서관과 브레라 미술관, 폴디 페촐리 박물관이 모두 그러한 본보기이리라. 카라바조, 만테냐, 라파엘로, 폴라이우올로 등은 전부 밀라노 태생의 예술가는 아니지만, 작품 수집가는 뛰어난 안목으로 시대의 대표작을 한데 모았다. 라 스칼라 극장에 이르면 편집과 조합의 능력이 극대화된다. 오페라야말로 비로소 여러 예술, 곧 ‘오푸스’의 복수이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밀라노는 부족한 창작력을 수집과 큐레이션으로 극복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밀라노가 누리는 선도적 영향력은 선조들의 안목 덕분이 아닐까? 그것이 밀라노에서 무언가 자기만의 길을 찾으려는 사람이 앞서 말한 ‘10개의 보물’을 경험해야 하는 이유다. 손가락 끝이 아닌,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곳을 보기 위해서!





베로나 아레나에서 공연된 오페라 <나비부인> 중 초초상의 자결 장면. © Fondazione Arena di Verona

베로나와 오페라
저녁에는 날아갈 듯 베로나로 향했다. 베로나 오페라 축제의 마지막 세 공연을 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로마시대부터 물자가 넘쳐 사람이 몰리고 살림살이가 풍요로웠던 터라 아레나가 들어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밀라노에서 언급한 빼어난 편집력은 베로나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팔라초 마페이 박물관과 아킬레 포르티 근대 미술관이 대표적 예다. 그러나 이보다도 베로나에서 첫째로 손꼽을 것은 테너 조반니 체나텔로(1876~1949)다. 그는 바로 고향의 유적인 원형극장을 되살린 인물이다. 1904년,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초연에서 핑커턴을 불렀던 체나텔로는 작곡가 베르디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던 1913년 아레나에서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과 함께 <아이다> 무대로 축제의 막을 올려 큰 성공을 거뒀다. 올해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의 일이다. 도약은 1947년에 또 한 번 이뤄졌다. 체나텔로는 그리스 태생의 무명 소프라노를 오디션에서 발탁했는데, 아밀카레 폰키엘리의 걸작 <라 조콘다>의 주역을 따낸 이 주인공은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마리아 칼라스다. 베로나 오페라 축제와 칼라스에 더해, 올해 아레나는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또 한 사람의 탄생 100주기를 기린다. 바로 이 도시를 주 무대로 하는 불멸의 러브 스토리 <로미오와 줄리엣>을 영화로 탄생시킨 감독 프랑코 체피렐리다. 이날 밤의 <나비부인>은 체피렐리의 연출을 다시 무대로 올렸다. 소박한 일본 시골의 정경을 펼칠 무대는 거대했지만, 체피렐리의 치밀한 계산으로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 <나비부인>에 출연한 리투아니아 출신 소프라노 아스미크 그리고리안은 최근 몇 년 사이 잘츠부르크 여름 축제를 비롯해 세계 오페라의 중심에서 빠지지 않는 손님으로 대우받는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개성 있는 음색과 탁월한 배역 소화로 걸작의 주인공을 꿰차는 중인 그녀. 객석에서 무대까지 거리가 먼 베로나지만, 가련한 게이샤가 된 그녀의 존재감은 손짓마다, 음절마다 차고도 넘쳤다. 나비부인이 핑커턴에게 버림받았음을 알고 할복하는 처연한 피날레에서 체피렐리가 만든 일본 이미지가 선홍색을 발할 때 체나텔로, 칼라스, 체피렐리의 얼굴이 차례로 뇌리를 스치는 듯했다. 공연이 끝난 뒤, 내일과 모레 무대에 오르는 <아이다>와 <라 트라비아타>를 기대하며 밤새워 북적일 브라 광장을 떠났다.

 

에디터 김혜원(haewon@noblesse.com)
글·사진 정준호(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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