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작품으로 본 한국 근,현대 미술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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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7

작가의 작품으로 본 한국 근,현대 미술

한국 근대와 현대미술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작가의 피, 땀, 눈물로 만들어졌다.

가장 보통의 미술, 박수근
(1914~1965)


전에 선보여진 박수근의 작품.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나는 인간의 착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보통의 가정에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린아이의 이미지를 즐겨 그린다.” 가장 평범했기에 가장 위대한 화가. 일생을 그림에 전념한 박수근은 서민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의 삶을 화폭에 옮겼다.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그는 가세가 기울어 중학교 진학도 포기할 정도로 궁핍한 유년기를 보냈다. 별도로 미술 교육을 받을 여력이 없었기에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당대 화가들이 미술학교에 입학하며 화단에 들어선 것과 달리, 박수근은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을 통해 공식적인 화가의 삶을 시작한다. 그에게 화가의 삶이란 사뭇 의미가 달랐다. 생계와 책임의 또 다른 말. 한국전쟁 당시 미팔군 PX에서 군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로 가족을 부양한 것은 유명한 일화. 고된 날의 연속임에도 박수근은 붓을 놓지 않았고, 전쟁 이후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짧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의 토속적 화풍은 이때 완성에 가깝게 형성되었다. 화강암 표면 같은 거친 질감, 인물과 풍경을 구분하는 굵은 윤곽, 사라진 원근법과 측면 혹은 뒷면으로만 단출하게 표현한 인물 구도는 당대의 한국화 혹은 추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박수근만의 개성이었다. 정규 교육의 틀에서 벗어났기에 가능한, 그리고 예술과 평범한 삶을 일체화했기에 가능한 그의 그림은 모든 것이 쉽고 빠르게 재생산되는 오늘날 특별한 울림을 전한다.





파멸이 아닌 애정의 조각, 권진규
(1922~1973)


남자입상(Standing Man), 브론즈, 12×11.1×49.5(h)cm, 1953
Courtesy of Kwon Jin Kyu Commemoration Foundation & PKM Gallery





스카프를 맨 여인(Woman with a Scarf), 테라코타, 36×26×45(h)cm, 1969년경
Courtesy of Kwon Jin Kyu Commemoration Foundation & PKM Gallery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비운의 천재 조각가 권진규.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권진규 작가는 일찍이 손재주가 좋았다. 열한 살 무렵 함흥상공회의소가 주최한 전시회에서 직접 제작한 실패(絲牌)를 선보여 입상했을 정도. 출중한 재능에 ‘조각’이라는 단어를 입힌 건 해방 이후다. 고향의 함흥미술연구소를 거쳐 1947년 서양화가 이쾌대가 운영한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김창열, 이영, 임직순 등과 함께 예술론, 미술해부학, 석고 데생을 공부했다. 1949년 도쿄 무사시노 미술학교 조각과 입학을 계기로 권진규 작가는 본격적으로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근대 조각의 거두 앙투안 부르델의 제자인 시미즈 다카시로를 사사한 그는 서양 근대 조각 사실주의 계보의 영향 아래 자신만의 조각 세계를 구축했다. 작업 초기엔 석조와 석고, 돌과 브론즈 그리고 테라코타를 끌어들여 재료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해 조형의 본질을 추구했다. 재료의 성질과 대상의 양감을 강조해 단순히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깃든 사실성을 끌어낸 작품을 제작했다. 그렇게 일본에서 작품 활동을 통해 구축한 조각 언어는 1959년 귀국과 함께 변주를 맞이했다. 당시 국내 미술계는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서 번진 영향으로 추상성을 추구하는 것이 대세였다. 일본에서 건너온 구상 조각가 권진규가 발을 들일 틈은 없었다는 것. 오히려 그는 테라코타 기법의 흉상과 자소상을 집중적으로 제작, 한국적 리얼리즘 정립에 힘을 쏟았다. 불필요한 외형적 요소를 배제하고 대상의 원초적 본질을 드러낸 그의 조각은 사실성이 더욱더 짙어졌다. 구상 조각이 비어 있는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비로소 가득해지는 숭고함과 영원성은 파멸이라 부른 그의 삶에 조각을 향한 애정과 고민만큼은 가득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여성이 아닌 화가라는 틀, 박래현
(1920~1976)


노점, 종이에 채색, 267×210cm, 1956, MMCA Collection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여인, 종이에 채색, 94×80.3cm, 1942, MMCA Collection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운보(雲甫) 김기창의 아내 이전에 우향(雨鄕) 박래현이 있었다. 풍족한 가정환경, 흔치 않은 유학의 기회, 뛰어난 감각과 재능을 겸비한 박래현과 그녀가 이룩한 화업은 시대가 여성에게 부여한 전통적 역할에 가려져 있었다. 1920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박래현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일본화를 수학하던 중 조선미술전람회 총독상을, 귀국 후에는 일본화가 아닌 탈전통적 한국 회화를 추구한 작업으로 1956년 제8회 대한미협전과 같은 해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에서 대통령상을 거머쥘 정도로 화단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화가로서 정점에 선 그녀였지만 결혼 후 육아와 가사를 작업과 병행하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1948년 <민성>에 기고한 수필 ‘결혼과 생활’에서 그녀는 “아침 6시쯤 일어나 기저귀 빨기, 밥 짓기, 청소하기,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것저것 치우고, 닭의 치다꺼리, 아기 보기, 정오면 점심 먹고, 손이 오면 몇 시간 허비하고, 저녁 먹고 곤해서 좀 쉬는 동안에 잠이 들면…. 자, 그러면 본업인 그림은 언제나 그리나”라며 화가와 생활인의 역할 사이에서 마주한 고충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가두려는 한계를 마주할수록 주어진 환경에서 이를 뛰어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김기창 화백과 함께 1948년부터 1971년까지 부부전을 개최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1957년 말에는 김영기, 천경자, 조중현, 장운봉 등 중진 동양화가와 백양회(白陽會)를 결성, 국내 순회전을 비롯해 타이완, 홍콩, 도쿄, 오사카 등 해외에서 전시를 선보이며 추상미술이라는 국제 미술계의 흐름을 마주하기도 했다. 특히 1965년 미국에서 개최한 순회 부부전,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 작가로 참가한 경험은 원시성과 추상을 접목한 독창적 작품 세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박래현은 기혼 여성 혹은 자녀를 둔 어머니에게 주어진 수공의 가사노동을 판화와 태피스트리라는 예술 장르로 환원, 지난 세월 자신을 가로막은 전통적 여성의 상과 역할을 예술로서 새롭게 맞이했다. 1976년 간암으로 갑작스레 타계한 우향 박래현의 작품 세계, 시대가 만든 유리 천장을 깨뜨리는 적극적인 행보는 젠더리스를 지향하는 오늘날 사회와 예술계에서 그녀를 다시금 돌아보는 이유일 것이다.





예술 운동이라는 시대적 소명, 유영국
(1916~2002)


작품(Work), 캔버스에 유채, 130×130cm, 1967, 개인 소장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작품(Work), 캔버스에 유채, 101×101cm, 1957, MMCA Collection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SNS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방탄소년단 RM이 미술관에 찾아가 본 작품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화가 유영국. 김환기와 함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며 한국 모더니즘 경향을 이끈 핵심 인물로 손꼽힌다. 1916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난 그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 교사 사토 구니오를 만나면서 미술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건 일본 유학길에 오르면서. 아카데믹한 엘리트 미술 교육기관이 아니라 자유로운 학풍의 문화학원 유화과에 진학했다. 마침 당시 일본 화단에서도 서구의 탈전통적 사조를 흡수하며 전위적 예술 열풍이 일고 있었는데, 한정된 매체를 벗어나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추상미술이 인기였다. 유영국도 단순히 평면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부조와 사진 매체를 활용, 조형적 관점을 바탕으로 추상미술에 접근했다. 그는 예술 그룹 운동과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36년 제7회 독립미술협회전 데뷔 출품, 1938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 협회상 수상을 계기로 당대 일본 추상미술을 이끈 하세가와 사부로, 무라이 마사나리 등과 어울리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에게 전업 작가의 길을 열어준 독립미술협회와 자유미술가협회 모두 재야 미술계에서 전위적 예술과 자유로운 표현 정신을 추구한 단체로 유영국은 회우로서 동료, 선후배 작가와 작품 세계는 물론 사상과 철학을 교류했다. 하지만 1943년 그는 전운의 그림자를 피해 고향 울진으로 돌아왔다.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어선을 타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때 그가 매일 마주한 울진의 바다, 산, 노을은 광복 이후 추상회화 세계를 구성하는 모티브가 되었다.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술 단체 활동도 재개했다. 이번에는 직접 나섰다.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신상회를 조직해 한국 모더니즘 운동의 선두에서 활약했다. 제도와 사조, 시대와 사회의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예술운동을 이끈 경험과 에너지는 1964년 늦은 개인전을 기점으로 강렬한 색채, 심화된 점·선·면의 조형 언어로 귀결, ‘절대 추상’의 회화로 나아갔다. 작가로서 시대적 소명과 독자적 작품 세계 구축. 그가 남긴 두 가지 업은 바로 우리가 오늘날 그를 선구자로 기억하는 이유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 최만린
(1935~2020)


0 96-18, 브론즈, 26×27×30(h)cm, 1996
이미지 제공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

2020년 11월 17일, 한국 추상 조각의 개척자인 최만린 작가가 별세했다. 향년 85세. 1935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서 수학했고 동 대학원에서 미술사 전공으로 석사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그는 해방 이후 국내에서 교육받은 1세대 조각가로 그의 작업에는 한국 조각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얽혀 있다. 불안정한 시대에 단절된 전통을 계승하고, 동시에 현대성을 수용한 독자적 조형 언어를 빚어내는 것은 작가의 일생을 관통하는 중요한 이슈였다. 최만린 작가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건 1950년대 말 ‘이브’ 연작을 선보이면서. 전쟁에 찢기고 부서진 마음과 생명, 죽음이라는 상흔을 모아 이브라는 태초의 인간 형상을 구현했다. 작가가 차용한 이브는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라 인간을 의미하는 대명사였지만, 그에게 ‘서구적 사념과 그 영향에서 온전히 벗어날 순 없는 것일까?’ 자문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그는 조형 언어를 형성하는 모티브에 변화를 준다. 서구의 재료와 틀을 버리고 붓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서예 필법으로 그린 점과 선을 조각으로 형상화하는 걸 시도한다. <천자문>의 첫 네 글자 천(天)・지(地)・현(玄)・황(黃)은 서양이 아닌 동양 문화권에서 조각의 뿌리를 찾고자 한 작가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다가왔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작업 ‘천·지·현·황’은 바로 한국적 조각의 정체성을 부단히 탐색한 결과물인 셈. 이를 기점으로 최만린 작가는 자신의 기저에 자리한 이성적·분법적 사고를 탈피해 마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아(雅)’, ‘태(胎)’, ‘맥(脈)’, ‘0’에 이르는 그의 후반기 작업은 이름 없는 모더니즘이 아니라 한국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동양철학을 공유하는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60여 년에 걸친 조각가의 인생과 더불어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와 학장,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역임하며 한국의 미술 교육과 행정 분야에도 공헌했다. 우리는 한국 미술에 일생을 바친 열렬한 미술인으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이정훈(미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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