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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26

거장의 시간

김구림, 이강소, 윤석남, 이건용. 한국 미술 거장 4인은 지나온 시간만큼이나 농후한 작품들을 그려나간다.

오늘보다 내일 더 새로운
김구림 Kim Kulim



블랙 중절모와 블랙 트렌치코트, 지팡이 모두 작가 소장품.





“혼자서 오롯이 책임지고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예술이 바로 미술이었어요. 그림 말이에요.”

김구림
김구림은 1936년생으로, 1958년 대구 공보관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후 앵포르멜과 서정적 추상에 머물다 다양한 매체 실험적 작업으로 넘어왔다. 회화의 방법론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조형적 실험을 진행해온, 한국을 대표하는 전위예술가다. 그의 작품은 현재 영국의 테이트 모던과 테이트 라이브러리 스페셜 컬렉션, 일본의 홋카이도 근대미술관과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미술관, 미국의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미술관 등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내 작품이 시장에 팔리기 시작한다? 그럼 ‘아, 나는 망했구나! 빨리 다시 새로운 작업을 해야지’라고 생각해요.” 은빛의 긴 장발을 곱게 묶은 김구림은 순간순간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아방가르드’이자 ‘최초’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김구림은 자신을 답습하지 않고, 또 다른 사람과 같은 건 절대 만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작업에 매진해왔다.
그래서 김구림이 독특한 행보를 걸어왔다는 건 예술가로 활동한 시작점부터 느낄 수 있는데, 여느 작가와 달리 학교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예술을 공부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대학교에서 수학하던 도중 작가는 헌책방에서 <라이프>와 <타임>을 접하고, 이를 통해 세상과 예술을 배웠다고 한다.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교수한테 궁금한 걸 질문하면 만족할 만한 답변을 못 들었거든요. 여기서 배울 게 뭐가 있나 싶었죠. 그런데 그 잡지에는 세상이 있었어요. 그래서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일까. 유난히 학연과 지연에 얽매이는 우리나라 그리고 미술계에서 김구림은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1958년 대구 공보관화랑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김구림은 연극,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몸담았다. 특히 1969년에 선보인 ‘1/24초의 의미’는 우리나라 최초의 실험 영화로 평가받기도 했다. 10분이 채 되지 않는 무성영화인 이 작품은 1초가량 이어지는 300여 개의 푸티지로 구성했다. 이미지가 연쇄적으로 지나가며 관람객은 시각적으로 아주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기존 영화처럼 연속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방식으로 만들었으며, 빠른 속도로 전환하는 푸티지는 당시 한국의 산업사회와 이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꼬집었다. 그해 7월 21일에 김구림은 현 코리아나호텔 자리에 있던 아카데미극장 뮤직홀에서 최초 상영회를 열었는데, 이때 동료 예술가인 정강자와 함께 ‘무제’라는 필름 퍼포먼스까지 진행했다. 이렇게 영화의 형식을 깨부순 것은 물론, 영화관이 아닌 ‘뮤직홀’에서 퍼포먼스와 같이 일종의 ‘총체 예술’로서 영화를 제안한 그의 작업이 혁신적이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런 김구림이 결국 그림을 선택했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죠. 영화 한 편 만드는데 많은 사람의 간섭을 받게 되더라고요. 혼자 하는 예술이 아니니까요. 음악이나 연극도 마찬가지였죠. 혼자서 오롯이 책임지고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예술이 바로 미술이었어요. 그림 말이에요.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 그림을 그렸죠. 그런데 과연 이게 예술이라 할 수 있나 싶었습니다. 다시 말해 ‘테크닉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겼죠. 그래서 이론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평론 공부도 시작했어요. 그렇지만 결국은 글보다 그림이었죠.” 그렇게 미술로 가닥을 잡은 그는 그동안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술 외에 다른 분야 전문가와 교류하게 됐고 또 필요해졌다. 1970년에 그는 ‘제4집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는 김구림이 얼마나 전위적이고 급진적이며 통합적 사고를 했는지 보여주는 집단이다. 을지로 소림다방에서 결성 대회를 하고 장자의 ‘무체 사상’, 그러니까 정신과 물질을 일체화하고 정치·경제·사회·예술·과학 등 전 분야를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통합하려는 시도를 보여준 이 단체는 결국 박정희 정권 아래 위협적인 조직으로 비치기까지 했다. 당시 이들은 ‘기성 문화의 장례를 지내자’라는 생각으로 관을 들고 사직공원에서 광화문과 남대문, 용산을 지나 제1한강교 백사장에 묻는 해프닝을 진행했지만 중도에 제지됐고, 안타깝게도 대중에게는 예술이라기보다 ‘미친 행위’로 읽혔을 뿐이다.
제4집단이 정권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와해되면서 김구림은 일본으로 떠났다. 이후에는 한국보다 일본과 유럽, 미국을 무대로 작업했다. 1974년 그는 일본 도쿄도현대미술관의 제9회 일본 국제 판화 비엔날레,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2회 국제 임팩트 아트 비디오-74에 참여하며 일본에서는 판화 기법으로, 스위스에서는 국내 최초로 비디오와 일렉트릭 아트로 주목받았다. 또 2012년에는 영국 테이트 모던에서 열린 <A Bigger Splash>전에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니키 드 생팔, 신디 셔먼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며 세계적 작가로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자 이단아로, 그가 선보인 예술 역시 평가절하된 김구림이 세계적으로는 ‘늘 새롭고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이는 전위적 작가’로 인정받은 것.
이렇듯 김구림은 늘 새로운 것을 제시했지만, 그것이 어떤 분야든 지금까지 그들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쌓아 올린 기성에게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나와 다른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배척하는 것이 비록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라지만, 예술가로 살아온 지난 시간 끊임없이 거부당해온 그의 심정을 우리가 감히 이해한다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김구림을 대표하는 ‘음양’ 시리즈에서 서로 다른 양극의 대립보다는 오히려 상대적인 것의 화합과 통합에 대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첨예한 상황에서도 김구림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솔직히 아쉽지만 지금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 아닐까요? 내 작업이 한 번도 옳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소신껏 살아야죠. 지금 내가 숨 쉬는 순간만이 중요할 뿐. 이러한 세간의 대우는 늘 이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죠.” 생명이 붙어 있다고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님을 김구림은 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모든 순간에 어떤 생각으로 무슨 행위를 하는가가 산다는 것에 있어서 핵심이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생각해보면 숨이 끊어진다고 죽는 건 아니에요. 제가 살아 있는 동안 해온 일이 남잖아요. 그것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거죠.” 이 백전노장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금보다 젊은 시절 날카롭고 매섭게 빛나던 눈은 이제 시간의 흐름 속 초월의 감정까지 담고 있다.






해답은 우리에게 있다
이강소 Lee Kangso



회색 터틀넥 CARUSO by Changkwanghyo.





풍경화가 그려진 화이트 롱셔츠는 COS, 나머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작가가 앉은 블랙 암체어는 현대리바트의 콜리코 체어.





“현시점에도 ‘실험 미술’은 여전히 유효하죠. 어떠한 형태라도 말입니다.”

이강소
1943년생인 이강소는 196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후 1973년 명동화랑에서 첫 개인전 <소멸>을 선보였다. 퍼포먼스와 설치, 회화, 비디오 등 다양한 실험적 작업을 선보여온 그는 단색과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회화 연작을 통해 전통과 현대 사이 접점을 제시하며 큰 호평을 받았다. 조현화랑, 화이트박스, 대구미술관, 갤러리현대,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런던 바비컨 센터, 테이트 갤러리, 일본 미야기 미술관 등 세계 곳곳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이강소는 붓에 페인트를 묻혀 한 호흡에 한 획씩 내리그었다. 카메라에 무심한 시선만 던져도 사진에서 힘이 느껴지던 그가 붓을 잡으니 한층 심화된 예술가의 포스가 뿜어져 나왔다. “언제 또 고운 옷을 입고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라며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한 이강소. ‘신체제’, ‘AG그룹’, ‘대구현대미술제’, ‘서울현대미술제’ 등 다양한 미술 운동에 참여하며 한국의 실험 예술을 이끌어온 그는 여든이 가까운 지금도 여전히 예술이 담을 수 있는 이미지와 현실, 그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이강소는 현재 회화 작가로 우리에게 더 친숙하지만, 사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실험 미술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1973년 서울 중구에 위치한 YWCA빌딩 지하 명동화랑에서 연 개인전 <소멸>에서 그는 깨끗한 화이트 큐브 공간에 선술집을 차렸다. 낡은 테이블과 의자, 무교동 거리에서 주워온 메뉴판까지 완벽하게 구비해 공간을 점유한 작가는 일상의 행위를 하얗고 깨끗하게 정제된 장소에서 각자 자기 방식으로 이를 재고해보길 바랐다. 이 작업은 ‘예술’과 ‘작품’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했는데, 말 그대로 전시를 찾은 관람객이 작가가 차린 선술집에 앉아 예술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강소는 이 작품에서 예술의 역할과 의미 그리고 예술을 보여주는 방식과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를 단번에 털어놓았다.
또 1975년 제9회 파리 비엔날레에서는 닭 퍼포먼스 작품 ‘무제-75031’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실험적인 작품으로 전 세계 예술인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목재 구조물 기둥에 닭의 발목을 끈으로 묶은 뒤 주변에 석고 가루를 뿌려 닭의 발자국을 관람객이 직접 눈으로 좇을 수 있게 한 작업이다. 자신은 멍석만 깔아줄 뿐 작품을 보며 무엇을 느끼고, 어떠한 경험을 가져갈지는 오롯이 관람객의 몫이라는 점을 이 작품을 통해 분명히 했다. “아방가르드를 지향해서 이러한 작업을 했다기보단, 한국 사람이자 작가로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물론 1970년대에 그가 선보인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이 지금은 센세이션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강소는 말한다. “제가 선보인 예술이 지금 와서 다른 세대에게도 성공적일 리는 당연히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험을 게을리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현시점에도 ‘실험 미술’은 여전히 유효하죠. 어떠한 형태라도 말입니다.”
이렇게 한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작업에 매진한 그는 지난여름 갤러리현대에서 약 3년 만에 개인전을 개최했다. ‘꿈에서 노닐다’라는 뜻의 ‘몽유’를 전시명으로 삼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차용한 단어로, 이강소 선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과연 우리가 사는 현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근원이기도 하다. “인간관계를 비롯해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은 약속에 의해 이뤄진 거죠. 개념에 개념을 더해 마치 그것이 진짜 ‘현실’인 것처럼, ‘존재한다’고 인식합니다.” 근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떤 대상의 존재와 이를 인식하는 것을 바탕으로 서로를 이해한다. 하지만 이강소에 따르면 존재를 규정하는 약속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존재 역시 끊임없이 변하고, 나와 관계한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기에 무엇을 채워서 작업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비워내는 데 집중한다. “주관적 사고를 작업으로 펼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흩어버린 상태, 허한 조건에서 작업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놓쳐버린 ‘순간’에 작업하려 하니 쉽지 않죠.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찰나의 것과 그 세계를 오롯이 작품에 투영합니다.”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 화려한 색채 작업도 비슷한 맥락에서 출발했다. “주체가 색이 된다는 것이 중요해요. ‘나’로부터 출발해 내가 선택한 건 어찌 보면 그저 나 자신의 취향과 정서를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색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유한 빛깔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과 이에 대해 인간이 보이는 반응에 조금 더 솔직하게 접근하고 싶어요. 색은 모두에게 본능적 감각을 선사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소통할 수 있겠단 생각이었죠.”
앞으로 색을 어떻게 작업에 적용할지에 대한 고민이 연구 과제라며 이강소는 넉넉하게 웃어 보였다.
직관적으로 이강소가 선보이는 회화 작업은 단색화로 읽힐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건 획과 여백이기 때문이다. “사실 단색화와는 크게 관계없다고 생각해요. 제게는 획과 여백 모두 에너지로 가득 찬 부분입니다. 서로 다른 에너지일 뿐이죠. 요즘 저는 물리학에 푹 빠져 있는데, 양자역학에 따르면 모든 것을 구성하는 건 결국 입자와 에너지죠. 창호지에 먹물 한 방울 묻힌 게 과연 무거운 쇳덩이로 작업한 것보다 못한 걸까요?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없다고 여기지만, 결국 이 세상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거대한 가능성의 세계입니다. 저는 그런 걸 작업으로 끌어오는 거죠.”
또 이강소는 “작가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작품에 생명력은 없는 법”이라고 말한다. 그는 어린아이에게 크레용을 쥐여주고 화지에 그리는 선을 보면, 그 흔적은 어른이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한 작가가 온 마음과 정신을 집중해 선보인 초심의 작업을 마치 어린아이가 그은 획과 같다고 본다면, 현재에는 자신이 무엇을 그린 건지, 또 어떠한 작업을 하고 있는지 늘 되새겨야 그 획의 순수함과 당시의 정신을 꾸준히 담아낼 수 있다.
마치 도인이 되어 참선하는 듯한 마음으로 자신을 채우기보다 비우는 데에 열중하는 이강소는 무엇이든 궁금해하고 작업하고 싶어 안달 나는 마음이 작가에겐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창작자나 다름없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상에서 다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니까요. 미술의 영역에서 창작한다는 건, 다른 사람보다 아주 조금 더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나를 둘러싼 것에 의미가 있다 여기고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창작물이죠.”






다정한 카리스마
윤석남 Yun Suknam



니트 칼라 블루종 재킷 Loro Piana, 오렌지 톤 스카프 Hermès, 블랙 팬츠 작가 소장품.





“나를 찾는다는 것은 거울에서 보이듯 어떤 모습을 찾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윤석남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난 윤석남은 성균관대학교 영문과를 나온 후 미국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 센터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했다. 1982년 서울미술회관에서 열린 <윤석남>전을 시작으로 금호미술관, 조현화랑, 서울시립미술관, 일민미술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영국 리버풀 비엔날레, 일본 가마무라 갤러리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선보였다. 최근 학고재에서 그간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을 조명한 개인전 <윤석남: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를 통해 여성운동의 중심에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너무너무 행복해요. 진짜 저는 행복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청청한 음성을 받치는 단단한 힘 덕분일까.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쓰는 통에 흔하게 닳고 해진 행복이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이 생경했다. 팔순을 넘긴 예술가, 윤석남은 여지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작업실은 행복의 시간이 소복소복 쌓이는 곳이다. 윤석남은 그곳에서 거의 날마다, 밤낮없이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화를 그리는 프로젝트에 매진하고 있다. 한지에 분채로 하는 전통 채색화 기법을 익혀 이미 34인을 완성했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100인을 채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지난봄, 학고재에서 열린 전시 <윤석남: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가 그 일부인 14점의 작품을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이는 자리였다.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여성들에 대한 기록은 그 활약상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지만, 없는 자료를 모으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인물을 선정하고 연구한다. “그분들을 그리기 위해선 자그마한 인물 사진 한 장이라도 있어야 해요. 몇 가지 단서를 놓고 공부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대충이라도 알게 되잖아요. 그중 어떤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상상해서 창작하는 거예요. 엄밀한 의미에서 사실화는 아니에요. 역사화라고도 할 수 없어요. 욕심 같아서는 역사화로 쳐줬으면 하죠.
안 해줘도 어쩔 수 없지만. 그런데 저는 그림이 그냥 종이가 아니라 그분들이 오셔서 대화를 나누는 것 같고, 참 이상한데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우리가 오랜 세월 잊고 지낸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를 상기하고, 낯선 이름을 복기해 그들의 삶을 형상화하는 일이 노작가에게 주는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요새 한창 작업 중이라는 이월봉 지사에 관해 열심히 설명하던 작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저는 사실 애국이라는 말이 좀 징그럽거든요. 그런데 이분들한테는 정말 그런 마음이 있구나 싶어요. 나를 사랑하기보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애국이잖아요.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친 사람이 많아요. 여성을 사람 대접하던 시기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그런 사람의 삶을 보면 경이롭더라고요.”
본인의 어머니, 시어머니, 친구와 동료, 독립운동가까지 윤석남은 이 땅의 여성을 관찰하고 작품의 주인공으로 세워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주었다. 명실공히 여성주의나 페미니즘 예술의 대모라고 불리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의 뜻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여성 문제를 주제로 전시를 하다 보니 관련된 팀을 만나고, 공부하면서 용어와 필요성에 대해 제대로 배우게 됐다는 것. 하지만 이제는 “저 여성주의 작가 맞아요. 그렇게 제대로 하고 싶어요”라고 기꺼이 말한다. 모든 인간이 그저 인간으로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지속적으로 저항하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분명한 생각을 뚜렷하게 밝힌다.
나를 찾고 나를 표현하기 위해 예술을 시작했고, 이 세상의 모든 여성이 자기만의 방과 자기만의 일을 갖길 바란다는 윤석남 작가. “나를 찾는다는 것은 거울에서 보이듯 어떤 모습을 찾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발견하고 발명해야 해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알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야죠. 존재하는 수만 가지 직업 중에서 무엇이 되었든 가장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그걸 발견하면 길이 확 뚫립니다. 돈을 잘 벌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갈 길이 보인다는 말이에요.”
40대에 접어든 후에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그 세월이 벌써 40년이 넘었다. 유화로 데뷔해 나무조각과 ‘핑크 룸’ 등의 대형 설치 작업을 거쳐 채색화에 이르는 동안 윤석남의 영역은 서서히 넓어졌다. 어린 시절, 열 살 남짓 되었을 때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선생님이 특별히 칭찬하거나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혼자 화가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도 1982년 첫 개인전을 치르고 10년간 전시를 하지 못했다. 그사이에 1년 동안 그림 한 점 제대로 그리지 못한 시절도 있었다. 그때만큼은 자신을 화가라고 할 수 있는지 확신이 없었단다. 그래도 하기는 해야겠다는 마음만 품은 채 고민에 빠져 있던 어느 날 강릉의 허난설헌 생가에서 만난 나뭇가지 하나가 앞을 틔워줬다. “그래, 이거야! 난 이리로 갈 거야.” 작은 나뭇조각에 그야말로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면서 캔버스와 막힌 벽을 뚫고 튀어나올 수 있었다.
“이제 기억력이 쇠미해서 처음에 어떤 심정으로 그림을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그때는 그림 안 하면 못 살 것 같았거든요. 내가 살아 있는 이유가 그림이었어요. 이것 아니면 할 게 없다는 심정이었어요. ‘유명해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는 행위 자체가 행복해. 넌 그러면 그걸로 됐어’ 스스로 주입하면서 다독였어요. 그게 바로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던 힘이죠.”
목표로 정한 일을 성실하게 밀고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마음의 수련이 이런 자세일까. 가지 않은 길을 계속 돌아보며 머뭇거리지 않고 끝내 자기 회의를 극복하는 힘 말이다. 윤석남이 여러 번 자신은 행복하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 의지나 결정에 의존하는 행복은 취약하다. “누가 뭐래도”, 그것에 대단한 가치가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나는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자기 확신과 창작 행위에서 오는 희열, 만족에서 비롯한 윤석남의 행복은 결코 위태롭지 않다.
물론 걱정이나 염려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꾸준히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는 의지만큼은 굳건하지만, 혹시 체력과 기량이 떨어져 인물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유일한 걱정이다. ‘원로 작가’라는 수식 뒤에는 으레 미래의 계획보다 과거의 영광과 노스탤지어가 따라붙는다. 그래도 윤석남의 ‘앞으로’가 궁금하다는 질문에 역시나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난 단순해요. 오래 살고 싶어요. 정신 놓지 않고 오래 살아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림 안 하면 뭐 하며 살겠수?”






미술의 본질에 대하여
이건용 Lee Kunyong



코듀로이 재킷과 후드 베스트 모두 CARUSO by Changkwnghyo, 운동화 New Balance.





블랙 볼캡과 회색 타이, 셔츠, 재킷 모두 작가 소장품.





“행위가 이뤄지는 그 순간에, 환경과 거기에 있는 사람들, 예술적 조건들, 나 자신의 컨디션 등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받아들여요.”

이건용
1942년생 이건용은 1967년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76년 서울 다사랑이라는 문화 공간에서 <이건용 EVENT>를 통해 대한민국 전국과 세계를 아우르며 다양한 퍼포먼스 작업을 선보였다. 2014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회고전 <달팽이 걸음_이건용>이 열리기도 했다. 그가 1976년 처음 발표한 ‘Bodyscape’는 현재도 진행 중인 연작. 이는 신체를 제한한 상황에서 선 긋기 동작을 통해 화면에 흔적을 남기는 퍼포먼스이자 회화 작업으로 최근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 <이건용: Bodyscape>를 통해 다시 한번 노장의 힘을 보여줬다.





회색 타이, 셔츠, 재킷, 스니커즈 모두 작가 소장품. 투명 레드 체어는 현대리바트의 콜리코 체어.

포토그래퍼의 신호에 맞춰 거침없이 팔과 다리를 뻗고, 근엄한 어른과 개구쟁이 소년을 오가며 자유자재로 표정을 바꾸는 사람. 캔버스 대신 카메라 앞에 선 예술가 이건용이 거침없는 모습으로 현장을 압도하는 비결은 과연 연륜일까, 천성일까 궁금해졌다. 이런 촬영은 난생처음 해봤다며 상기된 얼굴로 인터뷰를 시작했지만, 그 나이에도 정정한 천진함과 에너지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이건용에게 그리 낯설거나 힘든 일이 아닐 수도 있다. 1970년대부터 한국 현대미술사에 독특한 지문을 남겨온 행위예술의 거장 아닌가.
197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실제 나무를 뿌리째 지층과 함께 가져다 놓은 ‘신체항(Corporal Term)’을 시작으로 이건용은 꾸준히 어떤 행위를 통해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고 소통하고자 했다. 이후 장소성과 신체성의 개념을 기본축으로 다양한 예술 실험을 펼쳤다. 그가 만든 ‘이벤트-로지컬(event-logical)’이라는 용어는 본인의 작업 근간에 현상학과 언어 철학을 넘나드는 논리적 필연성이 있음을 밝히고 행위하는 예술가로서 그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리는 이정표와도 같았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논리철학논고>에서 주장한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의 총체다”와 “일어나는 일,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라는 1번, 2번 명제는 이건용의 지론이기도 하다.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와 조형학회(Space and Time, ST) 활동으로 ‘선구적 전위예술가’라는 꼬리표가 의심 없이 붙는 작가라고 해도, 정작 그에게 전위(前衛)는 목표나 결과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사유법이었을 것 같다. “나는 미술 바깥에서 미술을 봤어요. 미술 안에서 미술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거든요.”
그가 집요하게 던진 질문은 ‘예술 그 자체’였고, 예술 또한 이 세계에 포함되는 것이다. 가령 ‘장소의 논리’(1975)에서 그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원을 그린 후 중심부를 가리키며 “저기, 저기”라고 외친다. 이어서 원 안으로 들어가 아래를 향해 “여기, 여기”라고 외친다. 다음에는 밖으로 나가 원을 등지고 서서 어깨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거기, 거기”라고 외친다. 다시 순서대로 “저기, 여기, 거기”를 되짚는다. 마지막에는 원의 가장자리를 밟으며 “어디, 어디, 어디”를 읊조리다가 슥 사라진다. 이처럼 주체는 행위를 통해 장소를 점유하고, 바깥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행위 이전에 사유가 있고, 사유의 과정이 바로 퍼포먼스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신체 드로잉’ 시리즈(1976~)로 대표되는 회화 작업에서 이건용의 사유하는 주체는 육화된 주체로 거듭난다. 자신의 키와 팔이 닿는 데까지, 신체가 남긴 궤적이 곧 완성된 회화다. “회화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화면, 캔버스 같은 평면 조건이 필요하고, 그리는 자의 행위가 필요하고, 그 행위를 실현하는 매체인 물감, 연필 같은 것이 있어야 해요. 여기에 그리는 자의 신체 구조에 의해 자연스럽게 실현되며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회화입니다.” 타고난 신체를 극복하려 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물감은 자연스럽게 흐르거나 섞이고 하트, 날개,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형태도 탄생했다. 처음에는 빈 곳을 채우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현상 그대로 드러내는 것임을 잊지 않았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Paul Valéry)는 “화가들의 몸은 캔버스 앞에서 신성한 춤을 춘다”고 썼다. 화가들이 아니라 그들의 ‘몸’이 춤춘다. 이건용의 몸은 캔버스를 등지고, 때로는 뒤에서 그리고 위에서 춤을 춘다. 그 춤과 춤이 남긴 흔적을 맞닥뜨리는 관람객은 특정한 감정이나 생각을 통해 작품과 나름의 관계를 맺는다.
눈으로 본 것을 단순히 기술적으로 훌륭하게 옮기는 화가가 아니라 사실을 사실 자체로 인지하고 인정한 후 그 안에서 관계를 엮고, 궁극적 소통에 이르길 원하는 예술가를 사회는 즉각 알아봐주지 않았다. 엉뚱한 생각과 새로운 방법론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경직된 시대를 거쳐 긴 세월 몰이해를 견뎌야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이제 언론은 크고 작은 전시 소식, 해외에서 쇄도하는 러브콜, 옥션과 아트 페어에서 누리는 인기 등 이건용이 여기저기서 울리는 승전보를 앞다투어 전한다. 물론 그가 재차 말했듯 상황과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언제나 명랑하게 살아온 작가에겐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지만.
“예술이 반드시 아틀리에에서 심오한 클래식을 틀어놓고 하거나 완전한 침묵 속에서 떠오르는 영감을 받아 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행위가 이뤄지는 그 순간에, 환경과 거기에 있는 사람들, 예술적 조건들, 나 자신의 컨디션 등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받아들여요. 작업 중에 갑자기 소방차가 지나가거나 어린아이가 말을 걸어도 하나의 자연스러운 조건으로 작동하는 거죠. 환경이 달라질수록 내용이 풍부해지고, 같은 것도 또 다르게 표현할 수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을 맞듯 하는 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여기는 만큼 그는 성장 과정과 유년기의 체험이 미술가로 걸어온 여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안다. 중학교 3학년 수업 시간에 갑자기 벌인 ‘소통 실험’이나 외부의 예술에 대한 정보와 뉴스를 찾아 여러 나라의 문화원을 헤맨 경험, 미술반 후배들을 모아놓고 열성적으로 수집한 내용을 설명했다는 일화는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건용이라는 예술가가 고정된 관념이나 엄격한 전통에 얽매이기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흡수하고 생각을 확장함으로써 ‘미술’이라 부르는 영역의 지평을 넓혀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이건용은 멈출 생각이 없다. 그는 항상 이동하고 있다.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이가진(프리랜서)
사진 김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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